그래서 결론은 이렇게 됩니다. 처음부터 양식사학자들은, 성서가 형성되는 현장(삶의 자리)은 교회라고 말할 뿐, 그 이상 한 발짝도 나가려하지 않습니다. '교회다'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입니다. '교회다'라고 하는 말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전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교회라고 하는 것 가운데 두 개의 전승모체가 확실히 구별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흥미와 관심을 가진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 하나는 제도적 교권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점차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교권주의의 입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은 마태오 18장 15절 이하의 말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단둘이 있는데서 그를 충고하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사실이 확증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태 18, 15~17).
이것은 전형적인 교권주의자의 말입니다. 이대로 되면 예수가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은 전부 무효가 되고 맙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정도로 질서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교회는 산자를 추방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방인처럼 추방해버리게 되었고, 이윽고 이단에 대한 사형집행의 권리마저 거머쥐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자산이 그런 말을 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예수는 교회와는 관계가 없으니까요. '에클레시아'(교회)라고 하는 말은 아시 다시피 마태오복음서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제도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말은 추상적인 케리그마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까닭은 예수를 죽인 로마가 아직 시퍼렇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유다 세력도 결코 열세는 아니었으며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일부로 존재하는 형세였기 때문에, 가능하면 정면충돌을 하는 것 같은 말을 해서 적으로 만들거나 그들을 자극하는 것을 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추상화하여 누구에게 책임을 지우는 따위의 말을 삼갔고, 점차로 사실을 은폐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던 것입니다.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별 도리가 없다, 정치적 충돌은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권문제는 둘째다, 선교가 제일 중요하다, 교회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선교를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1940년경에 한국의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그와 똑같은 논리를 폈습니다. 존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타협하자, 이런 자들이 결국 승리했습니다. 그런 자들은 모두 친일파가 되었던 것입니다. 타협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후 25년 이상 민중 앞에서 그들은 아무 자격도 권리도 없었습니다. 유명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도 전부 타협파로서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사참배를 해도 어쩔 수 없지'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로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목표는 땅끝까지 선교하는 것이다." 그때 바울로는 땅의 끝이 스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기필코 스페인까지 갈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까지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로마에 의해 정치범으로 처형당한 자를 자신의 주(主)로 섬기는 것은 로마와의 충돌을 초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는 큰일이었기 때문에 그것만은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위대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말을 쓰는 대신 '십자가'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십자가'라고 말한 이상,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고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한 것이 됩니다. 십자가는 로마의 지배하에서 정치범이 처형되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아는 자는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라고 한 바울로의 말에 숨겨진 반(反)로마적 내용을 읽어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말과 '십자가'라는 말은 전혀 그 의미가 다롭니다. 단지 '죽음'이라고 했을 때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구별이 거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다릅니다. 바울로는 이 '십자가'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