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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민중언어

앞에서 말한 두 개의 전승모체 중 하나는 이름도 없는 사람들, 민중이었습니다. 그 민중은 민중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교회를 지배한 자들의 언어는 추상적이고, 또 바울로의 편지에서도 보이듯이 이른바 선언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나 민중의 말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민중의 언어입니다. 민중은 본 대로 이야기합니다. 설혹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이러저러하더라", "나는 봤어"라고 말합니다. 본 대로 들은 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민중이 본 대로 들은 대로 전한 말을 케리그마의 신학자는 곧 헬레니스틱한 문체로 통일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헬레니즘 문화권의 문체를 분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분석하고,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밖의 것은 틀(frame)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하는 성급한 결론을 내려버렸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몇 마디 예수의 말 이상의 다른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의 말보다도 '사건'입니다. 사탄을 쫓아내는 이야기,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 예수와 민중의 만남 등 이 모든 것, 하나도 빼지 않은 전체가 바로 마르코에게는 복음인 것입니다. 맨 처음에 마르코는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다"라고, 그 복음이 무엇인가 하면, 바울로가 말한 것 같은 개념적인 복음이 아니라, 마르코가 "지금부터 쓰는 모든 것이 복음"이라고 한 바로 그런 '복음'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부활한, 그것만이 아니라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 전부가 복음입니다. 유다 종교가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저속한 비종교적인 행태, 예수의 소위 죄인들과의 '코이노니아'(친교)는 물론이고, 예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내용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야기로서의 말, 이것이 민중의 언어입니다. 증언, 그것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합니다. 영어로 'martyr'는 증언과 동시에 순교, 즉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입을 열어 말하면 죽는, 그런 죽음을 뜻합니다. 힘이 없기에 맞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유식하게 글로 써내지는 못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또 전해서, 드디어는 이것이 커다랗게 되어 어떤 형태를 띠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것을 위험시하여 공문서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이것은 이야기 형태로 A.D. 70년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케리그마는 그보다 먼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케리그마적 내용도 알고 민중의 이야기도 알았던 마르코가 이 두 개를 합쳐서 엮어낸 것이 마르코복음입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마르코 역시 어느 정도는 타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협이라는 것은 실제로 적대하고 있는 양자간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악의로 민중의 이야기를 공식문서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보다 중요한 문제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예수의 사건을 탐구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존립이 문제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도 이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왜 여자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예수사건 이야기를, 그 사건의 내용을 지도자들은 신용하지 않았던 것인가? 왜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맨 먼저 게파가 봤다고, 제자들이 봤다고 하고, 여자들이 봤다는 것을 전혀 말하지 않았을까? 이 물음에 대하여 마르코는 16장 8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마르코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가설입니다만, "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서웠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자들은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지도자들은 여자들이 맨 먼저 부활한 주를 보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설명할 생각으로, 마르코는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마르코복음은 본래 8절에서 끝났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바울로가 '십자가'라는 말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십시오.

바울로의 편지 중에는 예수가 죄인들의 손에 죽었다는 표현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구체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심벌이 된 것은 역시 바울로의 공헌이지요. A.D. 10세기경에 십자가 대신 부활한 예수가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을 심벌로 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그러나 역시 '십자가' 상징은 지켜졌습니다. 복음서를 읽고 비로소 '십자가'라는 말의 내용과 그 깊은 의미를 알게 되었어요.

이것은 제 상상입니다만, 바울로가 그저 '죽음'이라 하지 않고 '십자가'라고 말한 것은 그의 내적인 고투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말은 예수가 누구에게 죽었는가를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 속에, 숨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어요. 누구에 의해 예수가 죽었는가는 바울로서신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빌라도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로마에 의해서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사도신경에도 로마는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신경은 지극히 추상적이에요. 단 하나의 진전이 있다면, 빌라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는 정도인데, 이것으로는 부족해요. 가령 히틀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경우에 히틀러의 이름이 단 한 번 나올 뿐이라면 그것으로는 너무 모자란다고 해야지요. 이렇게 볼 때 사도신경으로서는 너무나도 빈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위대한 삶과 죽음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공적인 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주의할 것은 교회주의에 떨어져서 그러한 사도신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회를 보호하려는 제만 치중하는 태도입니다. 나는 그런 경향에 대해 꾸짖을 입장에 있지 않고 오히려 책망을 들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신학자이지 목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교회를 보호하려는 멘탈리티(mentality)가 작용해요. 이건 위험한 일이지요. 교회를 보호하려는 생각이 진리 자체를 죽여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것이지요. 우리들은 거듭거듭 그 점에 대해 경고를 듣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루가와 오클로스의 관계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십시오.

오클로스를 구체화한 것은 루가입니다. 나는 루가를 절대로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클로스 대신에 라오스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루가는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루가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를 강조합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강조가 루가의 특수 자료 속에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역시 오클로스의 성격을 좀더 구체화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루가의 민중관에 대한 논문을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 민중신학에 대해 좀 말씀해주십시오.

성서는 결코 그리스철학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유 있고 배부른 자가 사유(思惟)를 하거나, 자연을 관찰하거나, 우주의 비밀마저도 탐구하려고 하는 지적 유희를 하는 그런 따위의 것이 아닙니다. 최초에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민중신학을 하기 전에 나는 「사건의 신학」이라는 글을 썼습니다만, 사건이 중요합니다. 서구에서는 태초에 '말'이 있었다고 해서 '말씀의 신학'을 전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그리스적 발상입니다. 성서에서는 최초에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볼까요. '99마리의 양과 1마리의 양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하고 묻는다면 누구라도 '99마리의 양이 중요하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성서의 이야기를 들어서는 곤란합니다. 한 마리에게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잃어버렸다'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와 같이 질문이 다르면 대답도 달라집니다. 어린아이가 4명 있는데, 그중 하나를 사랑한다면 그건 부모의 편애지요. 그런 식으로 물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한 아이에게 사건이 일어났다.' 질문도, 대답도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법률적으로 냉정히 생각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오클로스는 소위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어서 세상으로부터는 백안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예수에게는 그들이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인으로서 정죄되는, 즉 인간으로서 부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있는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할 것인가 계획을 세울 여유도 없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예수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런데 신학이 서양에서 발전했고, 교회가 강력한 권력을 얻게 됨에 따라서 신학자와 목사는 사건을 문제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특히 서구에서 대학의 신학교수는 모두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관리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건 따위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학문을 논리적으로 확립할까, 다른 학문과 경쟁하는 가운데서 어떠한 주장을 내세울 수 있을까가 가장 중요하게 되어 차츰 계몽가로서의 사명감은 퇴색해가는 것입니다. 목사도 또한 교회를 어떻게 다스려갈 것인가하는 문제만을 중요시합니다. 확실히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목사, 신학자만이 성서를 바르게 읽고 이해하고 있다고 하는 신화는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면이 성서에는 있는 것입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이 다른 면이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식이 그의 눈을 어둡게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현장에서 맨눈으로 성서를 읽는 사람은 성서에서 놀랄 만큼 새로운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학자, 소위 성서학자는 성서의 말하나하나를 문법적으로 분석하여 그 미세한 문법적 해석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성서를 갈수록 어렵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전문가다. 평신도인 너 따위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국민학교를 나왔을까말까 한 젊은이들,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노동자들과 젊은 소녀들, 그들을 모아서 함께 성서를 읽어요. 그리고 성서가 그들에게 어떻게 비쳤는가, 그것을 이야기하게 합니다. 역시 놀리운 결과를 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들로부터 배웁니다. 이때 신학자는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배우는 입장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을, 성서를 지식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는 소위 지식층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번역합니다. 이런 일밖에는 민중신학자의 역할은 없다, 이런 겸손함을 가지자,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어느 계급, 어느 입장에 서 있습니다. 대학교수가 되고 보면 의식주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하루하루 끼니를 잇는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런 사람들의 생활현장에 가서 직접 생생한 언어를 듣고자 합니다. 그 현장에 함께 있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서남동 선생도 나도 한동안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죽임을 당하거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민중을 의식화한다고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민중 속에야말로 순수한 그 무엇이 있다고 절실히 생각 합니다. 예수는 바로 그러한 민중과 얘기를 했던 것인데도, 그 이야기를 너무나도 어려운 언어로 바꾸어버린 긴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바울로의 입장은 어떻게 보면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헬레니즘 세계에 예수의 복음을 알리기 위해서 그런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꼭 그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 '십자가'가 상징화되어 '십자가형(刑)'의 의미가 상실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점을 좀 더 설명해 주십시오.

바울로가 사용한 '십자가'란 말의 내용은 물론 '십자가형'입니다. '십자가'는 바울로시대까지는 아직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동방 교회에서도 서방 교회에서도 십자가를 상징화하였는데, 특히 동방 교회에서는 치장을 위한 데커레이션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유럽에 갔을 때 가장 놀란 것은, 십자가를 어쩌면 그렇게도 조롱거리로 삼고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니발에 가면 춤추고 있는 거의 나신의 여인들이 가슴에 번쩍번쩍하는 것을 걸고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왜 십자가를 그런 곳에 걸어야 하는 것일까? 왜 그렇게 조롱거리로 삼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가톨릭 지역에서 길이 갈라지는 곳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지점에 가까이 가보니까 하얗게 칠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몸에서는 피가 빨갛게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피가 흘러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밑에 젊은 남녀가 거의 벌거벗은 채로 키스를 하면서 튕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여기서 이렇게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는 거기서 고생해라. 우리는 여기서 즐기겠다'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어쨌거나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럴 정도로 우리의 십자가에 대한 느낌이 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조롱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역사적 예수가 조롱당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말이지요.

십자가사건은 2천 년 전에 단 한 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은 그 증인입니다. 여러분도 증인입니다. 그 십자가사건을 추상화하는 것은 죄입니다. 일본에 있는 일본 노예, 한국에 있는 한국 노예가 같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러나 그들에 공통되는 기본적인 사건이 예수의 십자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십자가사건은 하나의 절정인 사건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필리핀적인 모습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라틴아메리카적인 모습으로, 아프리카에서는 아프리카적인 모습으로…….

▶ 누가 민중일까요?

누가 민중인가하는 물음은 언제나 나옵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을 하는 사람은 이러한 질문에는 당분간 답을 안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말하자면 민중을 정의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정의하는 것은 너무 나도 서양적이며, 정의하는 데 급급하다 보면 민중이 잊혀져버리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정의하는 일 자체가 유일한 테마가 되어버려서 민중에 관한 일이 학문의 영역 속으로 끌려들어가버리므로 당분간 정의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내가 민중인가, 아닌가하는 물음은 바보 같은 물음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일이지 남이 나더러 '너는 민중이다' 또는 '민중이 아니다'라고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민중이다'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자는 진짜 민중은 아닙니다. 불트만의 말을 인용하면, "사랑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자는 사랑을 이미 알고 있든가 아니면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알지 못하는 자일 것이다." 이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민중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자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어서 무언가 피할 구멍을 찾기 위해 묻는 것이거나 아니면 아무리 일러줘도 알지 못하는 자일 것입니다. 민중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일 뿐, 지식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경험했습니다. 우리들은 민중사건을 본 대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민중사건에 참가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당신은 부활을 보았습니까?' '당신은 십자가에 죽임당한 예수를 보았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민중을 정의하는 일 따위에 손댈 생각은 없습니다만, 민중을 이헤하는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층의 권력에 억눌리고, 경제적으로 빼앗긴 가난한 자, 힘없는 자라는 이해입니다. 또 하나는 일상적인 착취의 대상이라는 생각입니다. 진정한 민중의 현장에는 식민지의 경험이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착취당하는 현장은 식민지이며, 오늘날 말하는 제3세계입니다. 거기에서 민중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에야말로 민중이 있다고 하는 이론이 지금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강연을 했을 때 어떤 사람이 "독일에서 민중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해왔습니다. 독일에는 슬럼가도 없고, 노동자라고 해도 강력한 노동조합이 있습니다. 그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입니다. 특히 독일에는 터키에서 온 노동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외국인 노동자라고 하면 어떨까요? 대답이 아닌 또 하나의 질문이 되어버렸습니다만"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질문했던 사람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는 한때 필요에 따라 외국인 노동자를 100만 명 이상이나 국내에 끌어들여 자기네 공장을 돌렸는데, 지금은 필요없게 되니까 그들을 귀찮은 존재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터키는 옛날부터 독일의 적이었거든요. 지금 독일에서 터키인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나는 터키인을 들먹여보았던 거지요. 역시 그 질문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던 것은 그가 터키인을 미워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다음의 네 장(章)은 필자가 1986년에 일본 삿포로에서,
'재일(在日)아세아인 센터' 주최로 네 차례에 걸쳐 한 강좌를 정리한 것이다.)


List of Articles
    요한과 루가는?
    사탄은 구조악이다
    죄의 뿌리 一 공(公)의 사유화
민중해방과 성령사건
    이단으로 박해받은 성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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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의 성령운동, 과연 성서적인가
하느님 나라一민중의 나라
    하느님 나라 一 민중의 갈망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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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민중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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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부활을?
    사건으로서의 부활
    현존하는 부활사건
   
판권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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