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서 비로소 그들은 예수와의 연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우리들과 같은 상황 같은 조건 아래서 괴로워했다, 예수는 혼자서 고통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과 더불어 당했다, 우리들의 현재의 고난은 결코 예수의 고난과 분리될 수 없다고 하는 깨달음이 생긴 것입니다. 민중의 고통과 예수의 고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아니, 조금 더 나아가서 예수의 고통과 그의 죽음은 민중 자신의 고통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수와 우리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예수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이었다고 한다면, 2천 년 전 유다의 한 청년의 운명일 뿐이었다면, 예수와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검사가 취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어차피 다른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악법도 법이니까요." 그에게 나는, "당신 개인과 나는 관계가 없소. 당신은 개인으로서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지. 그러니 개인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런 원한이 없소. 당신은 절대로 한 사람이 아니오. 나를 심문하고 있는 당신은 한 사람이지만, 집단의 일원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폴란드의 바웬사가 한 사람이었을까요? 1인의 영웅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폴란드 노동자집단의 상징입니다. 결코 개인이 아닙니다.
개인에 대한 서양인의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페르조나'(persona)라고 하는 사고가 동양에는 없지요. 어제 나는 '우리'(we)라는 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성서는 인간을 개인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이 계속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예수의 수난은 개인적인 수난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수난은 무엇일까요? 예수가 즐겨 자신에게 사용한 '인자'라고 하는 표현은, 1인칭으로 사용될 때와 3인칭으로 사용될 때 각각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1인칭으로 예수 자신이 사용할 때는 '메시아'라는 의미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메시아라고 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면, 제자들이 '인자여'라고 불러야지 자기가 스스로를 '인자'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자'는 다니엘서 7장 13~14절에 있는 표현인데, 이것은 다니엘서 2장 44~45절과 관련시켜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기서 확실해지는 것은, 이 '인자'는 집단개념인 '민'(民)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아닙니다. '인자'는 영어로는 'cooperative'(협력적인, 협동의)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개인이 아닙니다. 노트(Martin Noth) 도, 한(Ferdinand Hahn)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한은 7장 13~14절을 시편 110편 1절과 관련시켜, 이것이 집단 개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은 예수가 역시 특별한 존재라고 하는 여지를 남겨놓으려고 하지만 말입니다. 집단개념이라는 입장은 E. 슈바이처도, C. H. 도드도, T. W. 멘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자'는 개인적 개념이 아니고 집단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런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그들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지만, 산약에서 예수에 관한 설명으로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이사야서 53장의 '수난의 종'도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수난은 개인의 수난이 아닌 민중의 수난입니다. 넓게 보면 인류 전체가 당하는 수난입니다. 그것은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충돌에 의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나자렛 예수'라는 개인의 운명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사탄이 지배하는 낡은 시대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입니다. 거기에 예수의 수난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결론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과 연결시켜본다면, 거듭됩니다만, 요한복음서에서의 예수의 수난은 '사르크스'(肉)를 가진 전존재(全存在)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찌르면 피가 나고 때리면 아프고 우리들과 조금도 다른 데가 없어요. 게쎄마니에서 기도할 때에도 신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어디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처참하고 버림받은 외로운 모습이었기에, 루가복음에서는 그 일부를 변경하여 "천사가 내려와 예수를 위로했다"고 씌어 있지만, 그것으로 예수의 고난을 감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기나긴 고난의 역사에 신은 강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수난에서와 마찬가지로 신 부재(神不在)의 현장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종교적 의미의 기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만 한국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숭배하는 예수의 사건에 있어서도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고난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나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예수의 수난에서 1970년대의 우리들 자신의 모습과 상황을 보았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와 우리들의 연대성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개인으로서의 예수가 자신의 어떤 생각 때문에 개인의 운명에 따라 죽은 것이 아니라, 나의 괴로움을 괴로워하고, 나의 죽음을 그가 죽었다고 하는 것을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렇게 되는 데는 마르코복음서의 수난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