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서술된 예수를 이제 살펴보기로 합시다. 내가 마르코복음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마르코복음 1장 14~15절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과거에 나는 이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15절이라고 배워왔습니다. 15절길은 예수의 설교를 집약한 것이라고 예외 없이 그렇게들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15절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4절을 빼버린 15절은 의미가 없다는 것, 중요한 것은 14절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발견했습니다. 우리들의 상황에서 성서를 다시 읽었을 때 그런 눈이 열렸던 것입니다.
14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의 공적인 출발은, 자신의 수행(修行)이 끝나고 적당한 시기가 되었을 때, 이제부터 출발해도 되겠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혹은, 붓다처럼 고난의 문제를 보고 출가(出家)할 준비를 갖추어 자신에게 적당한 상황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세례자 요한이 안티파스에게 체포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그러한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다른 경전과 다른 점입니다. 성서는 추상적이 아니고 구체적이며, 사건이 일어나는 확실한 계기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나를 포함하여 몇몇 동료들이 감옥에 둘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의 제자인 목사들이,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자기네 선생들이 감옥에 들어갔을 때 이제부터는 우리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자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뒤를 이어서 그들이 한 사람 또 한 사람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갈릴래아의 군주 안티파스에게 체포당했다고 하는 소식을 듣자마자 예수는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바로 이와 동일한 상황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마르코에 의하면 요한은 안티파스의 불륜(不倫)의 관계를 책한 일로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만,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요한은 민중을 선동하는 위험한 인물로 지목되어 정치범으로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소식을 듣고 어디로 갔는가 하면 예루살렘도 아니고 어떤 다른 곳도 아닌 바로 갈릴래아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체포한 장본인이 지배하는 지역인 '갈릴래아'로 간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건의 현장으로!' 직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실상이었습니다.
그 한마디 말은 실로 엄청난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폭력을 사용했는가, 안했는가는 별문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가 구체적으로 '프로테스트'(저항)를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충돌을 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장에서의 충돌을 전제하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갈릴래아는 그 당시 '젤롯타이'(열심당)의 독립운동 근거지로서 수많은 게릴라들이 산악지대를 근거로 삼아 출몰하고 있었습니다. 갈릴래아는 또한 땅의 백성(암 하 아레츠)인 민중이 살고 있던 땅이었습니다. 토양이 비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 살고 있던 백성들의 대부분은 토지를 갖지 못하고 농노에 가까운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속속 산으로 들어가서 젤롯타이에 가담했습니다. 반드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런 수단을 취했던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지금 한국에서는 예수시대의 갈릴래아 민중(특히 젤롯타이)과 같은 상황을 소재로 한 소설이 여러 권 출간되어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버림받은 갈릴래아! 600년간이나 외국인의 지배를 받았고, 유다로부터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 갈릴래아!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줏대 있고 끈기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었던 갈릴래아! 이방인의 세력이 지배했기에 오히려 갈릴래아인은 순수한 유다적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갈릴래아로 갔던 것입니다. 14절의 의미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인데, 이처럼 중요한 구절을 무시하는 것은 '현장'이라는 감각이 없는 서양인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서구 신학자들이 복음서에서 중요한 구절을 쉽게 간과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팠습니다. 그들은 설익은 밀이삭을 따서 먹었습니다. 그때 예수의 반대자들이 나타나서 그 일을 바난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가 한 말은 매우 유명합니다.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인권선언 제1장'이라고 늘 말해왔습니다만, 민중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 이 이야기 전체가 중요합니다. 이 부분은 중요하고, 저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민중의 이야기는 전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부분을 잘라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를테면, J. 예레미아스의 비유에 관한 분석에서는, "이곳의 핵심은 이것이다"라든가, "여기는 핵심이 두 개가 있다"는 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지적인 유희일 뿐 민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민중은 이야기 전체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석하여 갈가리 찢어 놓으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여기에는 이런 양식(form)이 있다든가, 문장을 양식으로 구분한다거나 합니다만, 민중의 이야기에는 양식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특별히 중요시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는 15절에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고 말했는데, 이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희랍어로는 '바실레 이아 두 데우'로, 직역하면 '신의 왕국'입니다. 신의 왕국이 도래한다고 하는 것은 로마인에겐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이것은 종교적 언어이므로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독일어에서는 'Gottesherrschaft'(신의 주권)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대단히 정치적인 언어입니다. '로마의 주권'이 지배하는 현장에서 '신의 주권'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여기에 정치적 의미는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현실에 대한, 현존하는 정치권력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요? 이 이상 더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그것은 실로 혁명적 선언이었습니다. 'basileia tou Deu', 'Gottesherrschaft'가 '곧 온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회개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메타노이아'입니까? 메타노이아는 근원적인 것이 되살아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