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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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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민중의 실체
민족민중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민족민중교회'라는 오늘의 제목은 광범하면서도 중요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나는 이같은 제목 아래 최근의 우리 민족사에서 그리스또저히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를 비록 단면적이나마 사적(史的)으로 반성하고 당면한 과제를 제시해보았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은 있어도 민중은 없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정말 실재하는 것은 민중이고 민족이란 대외관계에서 형성되는 상대적 개념인데, 언제나 내세운 것은 민족이었고 민족을 형성한 민중은 계속 민족을 위한다는 이름 밑에 수탈상태에 방치되어왔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는 계속 외세의 침략과 위협을 받아왔기에 민족의식이 강했으며, 민중은 나라사랑을 지상의 과제로 알았기 때문에 민족의 운명을 내세우는 정부에 무조건 충성을 보여왔으나 오히려 민중이 가장 푸대접받는 역사가 계속되었다. 민중이 민족을 형성하고 그것을 지킬 대권(大權)을 정부에 맡겼는데, 바로 이 민족이 개념화되어 민중을 혹사착취하는 데 이용되는 일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결국 민족도 없고 민중도 없고 그것을 이용한 정부만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중국대륙의 세력들과의 굴욕적인 협상이나 특히 한일합병 등은 집권자 몇 사람의 손에서 처리되었을 뿐 사실상 민족도 민중도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민족의 대권을 가진 정부에 복종했으나 착취와 혹사 외에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민중의 분노가 터진 사건 이 근세사의 홍경래사건이나 동학혁명사건 등이다. 저들은 모두 민족의 이름으로 학대받은 민중―특히 농민―봉기로서 민중에 의한 자발적인 혁명의 불길이었다.

그중 동학봉기를 보면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이 민족을 위기에서 살리겠다는 민족애에 바탕을 두었으며, 둘째 민중의 빼앗긴 권리를 도로 찾겠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핵심은 민중을 구하겠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제폭구민(除暴救民), 즉 폭정을 제거하고 민중을 구하겠다는 구호를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민중의 애쭉운동은 집권자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받았을 뿐 아니라, 집권자들은 의국군대를 동원해서 저들을 진멸하고 난민(亂民)으로 처리해버렸다.

오늘은 31절이다. 이것은 사리사욕으로 민족을 팔아먹은 정부는 없어진 마당에 순수 민중만으로 점령세력에 항거한 운동일 뿐만 아니라, 동학혁명의 불길을 피워올렸던 민중의 힘이 이념화된 사건이었다.

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중정신의 고차원적인 성숙성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독립선언서는 우선 '자주민의 선언'이라고 했고, '2천만 민중의 소리'라고 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세계 평화의 이념과 투철한 역사의식이 승화된 내용이다. 인류평등, 항구여일(恒久如一)한 자유발전을 전제로 하여 동양의 항구적 평화와 세계 개조의 뜻을 천명한 것이 평화이념이고, 구세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가 몰락할 것을 내다보면서, "아! 신천지는 눈앞에 펼쳐지도다. 위력의 시대는 지나가고 도의의 시대는 왔도다. 새봄의 세계가 와서 만물의 회소(回蘇)를 재촉하는도다. 물이 얼고 찬 눈 나리는 숨결로 땅 속에 웅크린 때는 지난 때의 세(勢)라면 더운 바람과 따뜻한 햇빛의 기맥(氣脈)을 떨치는 때가 이때의 세"라고 구가 한 것은 비록 억눌려 아름없이 지내면서도 우리 민중이 얼마나 성숙했던가를 천하에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 민중은 잔인한 침략권력에게 참혹하게 짓밟혔다.

36년간의 암흑시대에서 해방된 민중은 조국광복의 희열에 도취했다. 잃었던 나라를 찾은 기쁨으로 민족독립에 온 정열을 쏟았다. 민중은 처음으로 제 손으로 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이렇게 세워진 첫 정부는 권력을 잡자 변질되어 그 안중에 민족은 있어도 정권을 안겨 준 민중은 없었다. 날이 갈수록 그 안중에는 민족도 없고 정권만 있었으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중을 기만하고 민중을 누르고 민중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민중의 분노는 터져서 419혁명을 일으켰다. 이것은 동학혁명, 31운동의 민중의 얼이 다시 소생한사건이다.

그러나 민중의 봉기와 더불어 새롭게 민중에 의해 세워진 민주당 정권은 민중의 소리를 집약할 겨를도 없이 민중과 상관없는 군사 쿠데타에 의해 쓰러졌다. 이렇게 강권으로 정권을 잡은 현정권이 내세운 것은 민족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와 '조국의 근대화' 등을 구 호로 내세운 것이 그것이다. '민족적'이라면 민족이 전제되며, '민주주의'라면 민중이 전제된다. 그러나 민중은 안중에 없기 때문에 남은 것은 민족인데, 그 민족도 '근대화'라는 명목 아래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퇴색시켜버렸다. 그때 31운동, 419혁명의 민중의 혼은, 그것은 민족을 팔아먹는 짓이라고 항거했다. 그러나 현정부는 이 민중의 소리를 짓눌러버렸다. 그후 10여 년 동안 민중은 길들여진 짐승처럼 침묵만 계속했다. 학생들만이 민중의 소리를 간헐적으로 대변했다. 학생들은 홀로 고투하면서 곤봉에 흩어졌다가 또 일어서곤 했다.

이 정부는 위수령, 비상사태선언 등 점점 민중의 소리를 억누르다 마침내는 이른바 '유신체제'라는, 명실공히 민중의 소리를 배제하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하물며 동학 혁명, 31운동, 419혁명을 일으킨 이 민중이 그대로 죽은 척만 할 수 있는가?

학생들만이 마치 조직 없는 민중의 대변인인 것처럼 이들을 쳐다만 보던 민중의 일부가 민중의 입이 되기로하고 일어섰다. 그게 김동길이요, 김찬국이요, 지학순이요, 박형규의 소리였다. 그런데 저들이 200여 명과 함께 투옥되어 반국가적 죄인으로 15년형을 받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저들은 민중의 진정한 소리를 내뱉은 입이 된 것말고는 한 일이 없다. 저들은 그저 젊은 학생들의 소리에 화합하여 치사 한 기성세대의 비굴한 오명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 민중의 입이 되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정부는 저들을 죄인으로 투옥했다. 그러나 저들을 가두면 무얼 하나? 불만을 품은 민중의 분노가 그대로 있는데 입만 틀어막으면 뭘 하나? 민중의 눈이 있고 손과 발이 있는데! 아니, 저들마저 잠잠하면 저 거리의 돌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정부는 저들을 표창해야 한다. 저들이 민중의 분노가 돌이 되지 않도록 민중의 분노의 해독 역할을 한 정부를 위한 인사들이었으니 말이다. 저들은 썩고 부패한 정부의 폭정에 견디다 못해 개혁운동을 일으킨 최수운에게 미치지 못했으며, 최해월이나 전봉준처럼 폭동을 일으켜 관청을 불지르고 세금을 거부한 일도 없었다. 저들은 단순히 민중의 소리를 전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저들을 투옥한 것은 이 정부가 결국 민중의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될 체질이 되었다고 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동아일보사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동아일보가 법에 걸리면 재판에 걸면 된다. 그런데 음성적 교살 시도는 결국 민중의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저들이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다 투옥된 것은 민중운동의 큰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최해월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의 사면을 청원하기 위해 한양에 몰려와 대궐 앞에서 탄원하던 박광호 일파의 경우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민중의 평화로운 탄원이 마이동풍이 되므로 민권운동으로 번진 것이다. 그것은 최해월의 사면을 들어주지 않아 동학혁명으로 번진 과정과 같다. 그러나 아직도 이 민중은 제2 동학혁명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저들의 석 방을 탄원하는 민중의 소리가 얼마나 박해를 받았는가! 비록 일부 인사들이 석방은 되었지만아직 사면은 안한다고 하니, 민중은 계속 대궐 앞에 부복하여 탄원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또 죄가 되어 체포하여 구속한다면, 어떤 학생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영광입니다"했던 것처럼 초탈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지 모르지만, 민중의 편에 섰다가 구속되는 영광을 억지로라도 감수하는 후계자는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