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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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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이런 마당에서 교회의 입장은 어떠한 것인가? 이 모임은 그리스도 인들의 모임이며, 우리가 출옥을 기념하는 대상들도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원들이다.

저들은 왜 민중의 편에 섰는가?

우선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교회는 과거에 대해 자책하고 있다. 사람들은 한국의 교회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제 본분을 벗어난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 민족, 이 민중에 대한 잘못을 참회하는 이상의 일은 하지 못했다.

초창기의 한국 그리스도교회가 민중의 자각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사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31운동에 그리스도교회가 앞장서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그 구체적 표현이었으며, 그렇다고 그때의 그리스도교회의 운동이 오늘처럼 정교분리 원칙을 벗어났다고 비난하는 소리는 들어본 일이 없다.

그런데 해방 후의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꼴은 어떤가? 그 안중에 민족은 있어도 민중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정권이 민중을 짓밟는 것을 볼 눈이 없었다. 단지 그가 내세운 '민족'이라는 구호에 현혹되어 그 정권에 무조건 아부하고, '민족'이라는 구호 밑에 깔린 민중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419 당시 그리스도교회의 자세를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 민중이 부정부패의 탁류에 휩쓸린 채 냉가슴을 앓고 있을 때에도한국교회는 '인권'이나 '정의'라는 용어도 모를 정도였다.

마침내 어린 학생들이 봉기하여 혈전을 펼 때에도 그리스도교회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고, 비겁하기로 이름난 지식인 교수들 이 마지못해 학생들 운동에 가담했을 때에도 한국의 교회는 죽은 듯 잠잠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행위에 역하는 비겁한 태도였다.

예수는 권력층이나 부유층을 위한 것은 물론 아니었고, 모범적 시민이나 지식층을 위하지도 않았다. 그는 민중의 친구로 민중의 편에 섰다가 그 민중을 위해 쓰러졌다.

성서에는 민중을 표시하는 두 가지 다른 개념의 용어가 있다. 하나는 '라오스'(λαός)이며, 또 하나는 '오클로스'(ὄχλος)라는 그리스어이다. '라오스'는 오늘의 '국민'이라는 말과 통하는 것으로서 어떤 집단권내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 민중의 칭호인데 반해서 '오클로스'는 권외의 '대중'이다. '오클로스'는 한 집단 안에 있으면서도 받은 권리를 향유할 수 없는 무리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가장 처음에 씌어진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가 싸고돌았고, 또 예수를 무조건 따르며 그에게 희망을 건 사람들을 '라오스'라고 하지 않고 '오클로스'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오클로스', 저들이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며, 기성 사회에서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이다. 잃어버린 양이며, 백안시당한 탕자이다. 초청받지 않은 동네 큰 거리와 골목에서 배회하는 '가난한 사람들', '불구자들', '맹인들', '절뚝발이'이며, 해가 져도 일자리 없어 거리를 헤매는 실업자들이다. 눌린 자, 포로된 자들이며, 배고프고 헐벗었으며, 슬퍼 통곡하고 박해를 받는 자들이다.

사회계층적으로 보면 제4계급이다. 이에 반해서 집권자와 이른바 엘리트들은 예수를 적대하여 마침내 그를 고소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한 것이다.

예수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로가 말한 대로 인간적으로 볼 때 지혜 있는 사람들이 아니며, 권력 있는 사람이거나 가문이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었다(고전 1, 26).

초창기의 한국 그리스도교회에도 이러한 오클로스들이 모였고, 이른바 네비우스(J. Nevius, 중국에 있던 선교사로 한국 선교를 위한 선교원칙을 정했다) 선교정책도 이러한 오클로스를 중심대상으로 정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국 교회는 밥술이나 먹고 갈아입을 옷이나 있는 계층 이상이 모이는 곳이 되었고, 예수의 친구인 오클로스는 그 문전에 오기도 부끄러워할 체질로 바뀌었다. 이것이 한국 그리스도교회가 무력하게 된 원인이며, 마침내는 민중과 유리 될 뿐 아니라 예수에게서도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던 교회가 최근에 자던 잠에서 깨어나 잊었던 오클로스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 결과 눌린 자들에게 관심하게 되고, 저들의 입과 손발이 되기로 서서히 본래의 자세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반정부운동도 정치운동도 아니다. 단지 잃었던 예수의 정신으로 되돌아와 자기 동일성을 찾으려는 단면의 노출일 따름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그것은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체질개선과 더불어 새로운, 그러나 본래 모습으로의 급전환을 강요하는 명령에 의한 것이다.

새로운 국면을 의식한 것은 참된 자유가 없으면 선교의 자유도 없고, 이웃을 사랑할 자유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가난한 자, 눌린 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말이나 행위가 범죄로 몰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된 데서 비롯한다. 거기서 발견 한 것은 사랑을 범죄로 모는 것은 민중에 대한 정치경제적 구조악이라는 것이다. 이 마당에 이제 그리스도교회의 방향은 뚜렷이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