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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웃이 누구인가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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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웃이 누구인가

'휴머니즘' 하면 가장 구체적인 듯하지만 현실을 피하기에 적당한 연막이기 쉽다. '인간애'라는 말처럼 막연한 것이 없다. '박애'나 '자비'는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유명적 개념에 그칠 수 있다. 즉 그런 개념들은 그 대상을 그저 '인간'으로만 할때 이다. 그리고 단순히 '인간'이라고 하면 그것 역시 이름만의 '인간'이 남을 뿐이다. 평등주의를 권력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범주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노예가 아니라, 여자가 아니라, 아이가 아니라,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것으로 잃었던 권리를 찾고서로 동격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각 사람 하나하나는 오히려 '인간'이라는 추상개념에 페인트칠당해서 그 구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떤 인간 말인가?" 이 질문을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상황에 있는 인간 말인가?",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 인간인가?"라는 말이다. 이런 질문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나의 관계를 묻는 것이다. 거기에서 나의 당위를 찾아야 비로소 내 행위도 구체적이 되며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치'라는 것이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동인(動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서는 "인간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며,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다. 속칭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 25~37)는 "이웃이 누구냐?"라는 질문의 대답으로 많은 논의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위에서 논의한 뜻을 가장 집약한 이야기이다. 지금까지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누가 이웃이냐' 하는 문제에서 이웃은 바로 강도 만난 그 수난자라는 것과 그를 구출해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두 가지 견해로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두 견해는 상반된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 경우를 좀더 성격화해보자.

첫째, 이 상황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상한 것이다. 여기에 단지 '한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길바닥에 누워 있다. 그리고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그를 구제하는 것은 시간을 다투는 상태에 있다.

둘째,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이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에게도 생소한 사람, 따라서 기존질서에서 사마리아인이 그 '어떤 사람'을 책임을 져야 할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동향인이거나 동지이거나 친척이거나 식구는 더더구나 아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다. 이것만으로는 그가 이웃이 될 수 없다. 그런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하루에도 수없이 스치지만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금 그대로의 그들은 '인간'이거나 '짐승'이거나 간에 나에게는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

셋째, 여기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도 한 '어떤 사마리아' 사람일 수 있다. 만일 그가 그대로 그 장면에 눈을 감았다면. 그런데 그보다 앞서 제사장, 레위인이 그대로 지나갔다고 함으로써 이 사람과 대조시킨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은 단순히 한 명사가 아니다. 그는 바로 혈연상으로나 종교적으로 바로 저들이 대표하는 유다인들에게 멸시를 받고 있는 계층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천한 사람, 그러므로 수모당하는 집단의 한사람이 지금 강도를 만나 수탈당하여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구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을 받는 그런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그의 이웃이 된 것이다. 내 계획, 내 기존 가치관 따위는 계산할 사이도 없이 나를 압도해오는, 그러므로 내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가 타던 말에 태워" 그를 구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가치기준이 생겼다. 그것은 수난당하는 저 사람, 길가에서 위험에 직면한 저 사람을 구하는 데 보람을 느끼게 된 그가 바로 저 사람처럼 위험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죽어도 좋다'고 각오하고 "자기가 타던 말"에서 내려 저 사람을 구하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가 발견한 새로운 가치가 하는 일이다.

이것은 유명론적 절대가치란 없고, 구체적 상황에서 나에게 '당위'(sollen)가 되는 것이 바로 가치라는 말이다. 이러한 예수의 기본적인 입장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예가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마태 18, 12~14; 루가 15, 4~7)이다.

이 비유는 만담으로 된 비유이므로 그때 듣는 자들의 입장을 최대한으로 상상해보자. 목자란 양치는 것을 생활수단으로 삼는 자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경제적' 계산이 중요하다. 그는 수량적 가치관에 서야 한다. 그런 입장에 있을 때(日常性) 그에게 양은 바로 돈이요 식량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어떻게 하든지 잘 길러 최대의 값을 받고 팔아버릴 수익의 대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가치를 따지면 두 마리가 한 마리보다 크고, 살진 것이 여윈 것보다 크다.

그런데 목자와 양의 관계는 돼지치기와 돼지의 관계와는 다른 면이 있다. 그것은 목자와 양 사이에 생겨난 교류이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또 그를 신뢰하며 목자도 양들을 지켜오면서 일종의 '정'이 든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는 장사소관이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고무신짝을 팔아버리는 상인의 마음과 양을 파는 목자의 마음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고무신짝과 양은 물량적 가치대상이라는 데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런데 한 사건이 일어났다. 백 마리 양 중 한 마리가 실종되었다. 실종되기 전에 그 양은 백 마리 중의 한 마리에 불과한데 실종사건이 이 목자에게 물량적 가치관을 깨뜨리게 했다. 즉 그는 아흔아홉 마리(물량적으로 절대가치)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이때 그 한 마리 양은 절대가치가 된 셈이다. 그러므로 찾은 양은 이미 계산의 대상이 아니라 애정의 대상이 되어 그 잃은 한마리 양을 찾았을 때 그는 한마리 양의 값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한 비용을 쓰면서 그 기쁨을 축하하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도 '이웃'이란 뜻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막연한 인간이 아니다. 구체적 사건에 부딪힌 사람, 내가 만나 구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내 스스로가 그 자리를 피하지 않고 그에게 손을 뻗을 때, 거기 절대가치로서의 이웃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에서만 절대가치가 드러나는가? 그렇지만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