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_A_6s

    4. 민중과 예수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4. 민중과 예수

어떤 체제이돈지 그것이 체제인 한, 거기에는 위계질서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체제의 가치관의 반영이다. 그런 가치관이 뒷받침될 때만이 그 체제에서 각 계급의 신분이 인정된다.

프랑스혁명을 기점으로 세계급으로 분류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마르크스에 와서 가장 밑바닥의 계급을 '프롤레타리아'라고 하고, 그들이 주권을 잡은 혁명을 주창해서 공산주의체제를 낳게 했다. 그것은 가치관의 혁명이다. '프롤레타리아'라면 눌리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계층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착취당해서 가난하다는 것에 초점을 둔 것 같다. 물질분배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는 유물론에 입각한 그로서는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한 결과안지 모른다. 그러나 실상 그가 프롤레타리아 계급 자체의 미래를 어느 정도 진지하게 생각했는지는 의문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내세운 것은 혁명의욕을 자극하는 것은 될지언정 실현 가능성은 애당초 없었다. 그 까닭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선동하여 혁명을 이룩하는 계급은 프롤레타리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러시아 공산혁명의 주역은 지식인 계급이었다. 그들은 이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무산계급의 증오심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어진 권력이 프롤레타리아에게 넘어간 일은 없다. 경제적 재분배로 경제차원에서 눌린 계급에게 혁명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반면에 그들은 다시 소수집단의 권력독점에 이용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피압박자의 위치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됐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권력욕에 대한 몰이해가 가져온 치명적 허점이다. 권력욕이 그가 바로 비판경계한 현실, 곧 인간(프롤레타리아)을 물화(物化)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예수가 철두철미 민중의 편에 섰다는 것은 현금에 와서는 흔들릴 수 없는 정론이 되었다. 마르코는 이 민중을 나타내는 데 '오클로스'(ὄχλος)라는 단어를 골라 썼는데, 그는 의식적으로 그와 유사한 단 어인 '라오스'(λαός)나 '플레토스'(πλήθος)와는 구별하여 사용한다. '라오스'는 오늘의 '국민'에 해당되는 말로서 소속이 분명한 대중을 말하는 데 비해, '오클로스'는 소속이 없는 소외된 '무리'이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가 몰려오는 오클로스를 보고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불쌍히 여겼다"(마르 6, 34)고 한 것은 오클로스에 대한 이러한 일면을 보여준다.

오클로스가 당시 지배층에 의해 경멸받고 소외되어 있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데가 마르코 2장 13절 이하이다. 많은 민중이 예수에게 나와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13절). 레위 집에 많은 "세리와 죄인"이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참여했다고 한 것은 민중의 성분을 밝히려는 마르코 기자의 의도적 편집이다. 저들이 어느 정도 소외당하고 있었는지는 바리사이파들의 비난인, "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는가"라는 말에서 충분히 노출된다.

예수가 이르는 곳마다 그를 무조건 환영하는 것은 바로 이 이름없는 민중이었다. 또한 예수가 무조건, 아무런 비판 없이 맞아들이는 것도 바로 이 민중이었다. 바리사이파와 사제계급은 물론 '제자'들 마저도 사정없이 비판하는 장면이 많은데, 이 무리—유다 사회에서는 죄인—들을 책망하거나 비판한 장면은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저들을 어떤 가치관에 의해서 평가한 일도 없다. 예수는 결코 저들에게 윤리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저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저들의 주권행사를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저들의 '위치'를 선언한다. '민중'이 그를 "둘러앉았을 때 ", 예수의 혈연의 가족이 그를 찾았다. 그때 그는 자기를 둘러앉은 민중을 둘러보시며 "보라, 여기 내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다"(마르 3, 34)고 선언한다. 예수는 자신과 민중이 함께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임을 선언한 것이다. 다른 장면에서 이 민중에게 그럴 수 있는 어떤 가치를 인정하는 암시도 없다. 가치가 있다면 바로 '민중'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세리와 죄인들을 지배층의 비판에 대해 옹호하면서 "나는 의안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왔다"고 할 때도 '……하기 때문에'라는 단서는 없다. 단서가 있다면 죄인, 말하자면 당대의 체제에서 소외됐다는 것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기존체제에서 무가치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이유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예수의 어린이들에 대한 자세가 중요한 열쇠를 쥐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