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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의 두 얼굴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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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동양적 지혜의 말로서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봉건사회에서 볼 때 민중의 가치에 대한 최대의 평가임과 동시에 최대의 경고이기도 하다.

민심은 양면을 갖고 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는가 하면 일면 민심은 우매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민심은 바람에 따라 이리 휘고 저리 휘는 풀처럼 흔들려서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른바 군중심리라는 것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두고 한 말이다. 어제까지 그렇게 좋다고 야단하던 것을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씻은 듯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군중의 인기를 타는 사람들은 바로 그 군중에 의해 쉽사리 버림을 받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반면에 민심 또는 군중만큼 끈질기고 강한 것도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분명히 바람 앞의 풀처럼 지조없이 이리 휘고 저리 훤다. 그러나 불던 그 바람아 멈추면 그 바람에 완전히 항복한 것 같던 것들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일제히 줏대를 살려서 꼿꼿이 선다.

이같은 현상은 그 초목이 작으면 작을수록 가냘퍼 보이면 보일수록 그러하다. 크고 굵은 초목들은 약한 바람에는 끄떡하지 않고 그저 그 잎이나 가지들이 흔들릴 뿐이지만 그 바람이 세면 마침내 부러지거나 그 뿌리가 온통 뽑혀 더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가냘픈 풀은 언제나 다시 일어선다. 그래서 속담에는 잡초는 죽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민중의 강인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우리는 한 민족의 역사를 제왕이나 집권자 아니면, 하여간 두드러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 성쇠의 판가름이 난 것으로 보아왔다. 반면에 어느 시대의 어떤 현상은 상위층에서 된 일인데 그것으로 바로 그 시대 또는 그 민족을 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견해에는 날조된 것이 많다.

사람들은 한국이 그같은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자기의 고유성을 잃지 않은 것을 수수께끼처럼 말한다. 중국대륙의 세력은 우리 땅을 제 문턱 넘나들듯했다. 중국 대륙에 신흥세력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를 길부터 들일 셈으로 몰려와서 이 땅을 초토화했으며 왕조를 굴복시켰다. 그럴 때마다 왕조를 비롯하여 이른바 이름있는 지도층(巨木)들은 모두 그리로 휩쓸려서 저들의 언어와 풍습제도를 채택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네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언제나 속을 완전히 빼앗긴 산 송장이었거나 아니면 거세당하여 재기불능의 상태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누가 이 민족사를 이어왔나? 누가 우리 얼과 말과 풍습을 지켜왔나? 그것은 어떤 바람이 불든지 마치 바람에 눕는 갸냘픈 풀잎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는 오합지졸 같았던 이 민중이었다. 저들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그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줏대를 꼿꼿이 세우고 다시 일어나 비록 가냘프나마 이 민족의 역사를 이끌어왔다. 그렇게 보면 민중무리씨알이 바로 이 나라 역사의 줏대요,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