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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국 혼의 전승자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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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혼의 전승자

한국의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 한국민이 그 민족적 고유성을 유지한 것이 수수께끼라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중국대륙과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그것은 수수께끼 같다. 왜냐하면 정치, 군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자주적일 수 없었고, 사대주의가 역대의 정치원칙처럼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사계(史界)에서는 한국 민족주의가 대(對)중국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문화적인 수용 자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한문화(漢文化)에 대한 추앙자세는 철저히 사대적이었다. 중국대륙의 기상도는 즉각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고, 한국 지배층이 이끄는 정치는 중국대륙을 감지하는 안데나의 역할을 잘하는 것을 최선의 길로 알았다. 그것은 의석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에서 그러했으며, 종교와 윤리의 기준도 그쪽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얼마나 대륙적이냐가 바로 계층성의 표시가 되었다.

한문이 우리나라의 관용어로 받아들여진 지는 수천 년을 헤아린다. 그리고 관용어에 대한 지적수준 여하가 바로 계층성의 구체적 척 도였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의 유산이란 몽땅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정치제도나 생활양식도 모방적이었다. 때때로 중국대륙의 세력에 반한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중국대륙의 세력이 바뀔 때 그 전의 종주국에 대한 신표(信表)였을 뿐이지 주체성의 발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중국대륙 세력과의 관계에서 민족주의가 싹툴 수 없었다는 주장은 수긍할 수 있다. 중국대륙의 세력은 한반도에 드나들기를 자기 집 문턱 넘나들듯했다. 그것은 국경의식마저 희미해질 수밖에 없도록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민족이 고유 한 자기를 지켜온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민중의 역할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한국의 민중은 한문화에 속하지 않았다. 저들의 의식주의 양식을 위시해서 뜻을 전달하는 언어까지도 실존적으로 형성하였다. 그들은 오랜 역사 동안 밖으로부터는 물론 위로부터의 지원을 받은 일이 없이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꾸려나갔다. 그들의 생활자세는 기후와 그리고 정치경제사회 여건과 함수관계에 있었다. 저들은 지원은 고사하고 오히려 언제나 착취를 당하는 입장에서 자기수호와 생존의 욕으로 자신을 존속시켰다.

사람들은 우리 민중문화가 '언문'으로 집약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문'과 '민중'을 직결시키기 전에 짚고 넘어 갈 것이 있다. 그것은 언문의 제정동기를 볼 때 세종의 민중애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민중을 다스리는 데 필요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한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음(音)을 기초로하였다는 것은 이미 사용되고 있는 민중언어를 표현하는 도구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말은 '언문'이 있기 전에 민중의 언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한문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 불상류동"(國之語音 異平中國 與文字 不相流通)이라 한 것은 이런 현실을 말한다. 정부와 지배계급은 한자만을 쓰고 훈민정음은 언문이라고 하여 상놈이나 여인들이 쓰는 글이라고 멸시해왔다. 언제, 누가 한글을 언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언'(諺)자가 '상인(常人)의 말', 즉 상놈의 말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양반계급이 뚜렷해졌을 때 그들과 구분되어 천시받던 계층에서 한글(언문)을 사용했을 것은 틀림없다.

언문은 이야기를 담는 그릇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미 언문고담(諺文古譯)이라는 말이 있듯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나 『월인석보』(月印釋譜) 등 왕실이나 불교를 이야깃거리로 쓴 것을 필두로, 주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데 '언문'이 사용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민중의 뜻은 반드시 언문에 의존하지 않고 계속 구전으로 전승되어왔다. 그것은 민요나 만담 형식으로 그 근원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삽시간에 전파를 터듯이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

민중의 구전언어는 의식적으로 문서화하는 것을 기피했다. 이런 현상은 박해를 당할 때일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 이유는 극히 간단하다. 그것은 기밀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구전은, 형태를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모양 없이 전국을 휩쓴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포착 되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할 사람에게만 전달된다. 가령 한문족(지배층)에게는 안 들린다. 혹시 듣는다고 해도 그 뜻을 알기 어려운 것이다. 어쩌다 그 뜻을 알았다고 해도 그런 말을 퍼뜨린 '범인'을 잡을 도리가 없다. 까닭은 증거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오늘의 루머와도 같다. 언론이 탄압을 받으면서 루머형식으로 퍼져 나가는 의사소통은 맹렬한 힘을 발휘한다. 총칼을 가지고 아무리 유언비어를 단속해도 그 세력을 막을 도리가 없다. 구전의 민중언어가 담은 민중의 의지를 막을 도리가 없다.

해방 전에 철든 사람들은 누구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라는 민요를 듣거나 불렀으리라. 그것이 언제부터 불리어졌으며 작자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잘 몰라도 그것이 문서화된 전승은 아닐 것으로 안다. 이 민요는 동학농민봉기 때 시작되었으리라. 조선조 말기에도 그리고 일제시대에도 금지된 민요는 계속 전달되었다. 문서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폐기될 수 없었고, 백수 년 세력이 바뀌어도 계속 불리어졌고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으며, 비록 어린이들은 그 뜻을 모르고 불러도 그것을 듣는 어른들은 그 민요에 담긴 역사적 얻을 계속 상기하면서 다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박해받은 민중이 서로 소통하는 전형적인 민중언어의 기능이다.

구전이란 입―귀―입으로 전해지는 전승법이다. 누가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 전해졌을까?

우리나라 마을이면 반드시 볼 수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보면 상상되는 그림이 있다. 마을 어느 한 자리에 누가 일부러 심었는지 또는 누가 지정했는지도 모르지만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 돌담을 쌓아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정자가 있는 마을도 있으나 그것은 이보다 발전된 형태이다. 한가한 때나 또는 일을 끝마친 저녁이 되면 그 느티나무 밑으로 동리사람들이 모여든다. 이 자리에는 으레 장기판과 바둑판이 있는데, 중심에는 그 마을 노인들 이 기다란 담뱃대를 물고 있다. 이들은 이 자리의 단골이라기보다 주인격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세대별로 자리하고, 노인들이 두는 장기를 기웃거릴 수 있는 연령층, 더 젊은 층은 또 그 아래 있고, 아이들은 그 주변에서 뛰어논다. 이 자리에서 전승작업이 자연스럽게 벌어 진다. 그중 하나는 언문 이야기책을 유창하게 읽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전에 아무개가" 또는 "옛날에 어디에서" 따위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야기책은 햇빛이 있을 때나 읽을 수 있고, 어두우면 이야기밖에 할 것이 없다. 이야기는 노인 중의 한 사람이 시작하나 마침내는 다른 사람들이 맞장구를 치며 비판 또는 강조 하거나 그와 상응하는 다른 이야기로 번져나간다. 세대별로 앉은 젊은 층들은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서 그 마을의 전통, 그리고 나아가서는 국가적 정세 또는 국제적 인물 이야기들을 듣는 동안 그것을 전승하는 이야기 속의 정신을 이어받는다. 부인들도 담 너머에 앉아 듣는다. 이렇게 해서 어떤 정신이 전승되며, 그것은 그 마을 공동체의 흔들 수 없는 규범이 된다. 이 자리는 공개되어 있지만 비밀이 보장된 장소이다. 그것은 마을의 위계질서와 서로의 신뢰가 철저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의 서슬이 푸르러 이른바 문화인들은 완전히 침묵했거나 어용언론을 펴는 길밖에 다른 길은 상상도 못할 때인 어린 시절에 이러한 느티나무 밑에서 독립군 이야기, 우리의 해외정부 이야기를 들었고, 애국가까지도 배웠다. 그뿐 아니라 녹두장군 이야기, 안중근 의사와 이준 열사 이야기도 들었다. 그것은 어린 내 가슴에 진하게 박혀 진주알처럼 커지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언문족'이었고, 나의 아버지는 '한문족'이었다. 그런데 한문족인 아버지로부터 공자왈, 맹자왈을 수없이 들었으나 머리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 그 대신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결코 잊혀지지 않고 언제나 '나'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언문 족인 어머니는 '자(子)왈'을 못하는 대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의 이야기는 꼭 옛말처럼 한 것만이 아니다. 콧노래 비슷한 노래 속에도 이야기를 담았다. 가령 어린아이를 업고 잠을 재울 때 박자를 맞추어 토닥거리면서하는 그 단조로운 노래에 담은 이야기는 나의 뇌리에 들어와 오래오래 작용을 했다.

이상에서 나는 구전적 민중언어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자기를 잃지 않고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기적이 아니고, 위와 같은 민중의 구전적 전승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의 지배자들이 자기들의 안위를 찾아 다 변절되는 동안에도 우리 민중은 우리의 얻을 이같이 계승했다는 것이며, 그런 뜻에서 민중이 우리 역사의 주인이란 말이다. 저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세력권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지배자들처럼 배우고 세력권 안에 들어가면 외래문화에 쉽게 동화될 뿐 아니라 외세를 타기 위해 자기를 팔아 버리는 꼴이 계속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