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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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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우리에게 문제 되는 것은 집권자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권력을 사유하고 민중을 탄압하는 독재자의 현실입니다. 독일 교회도 잔인한 독재자 밑에서 그같은 쓴 경험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두 나라설을 견지한다면 그것은 이 세계로부터의 도피이거나 현실에 대한 외면 이상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한국은 현대사의 시작부터 독재정권 밑에서 시달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독재자들과의 싸움을 지속했는데, 그 투쟁은 1970년대 초반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이 독재자들이 우리를 향해서 그 두 나라설을 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독재자들은 그럼으로써 교회나 크리스천들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경고를 해 왔습니다.

우리는 인권을 위한 이 투쟁에서 비그리스도인들과 연대했습니다. 이 싸움과정에서 우리는 인권유린이 구조적인 악의 결과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조악에 대해서 우리 싸움을 확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말한 사탄아 바로 이 구조악임을 인식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예수와 더불어 그 나라를 위한 종말적 차원의 투쟁임을 이해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말해야 할 것은 이른바 주객도식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이 사고도식을 서구 신학의 전통에서 배웠습니다. 그로부터 우리는 쉽게 자신을 주체로하고, 대상을 객체로 삼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 주체로서 객체를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포용할 수도 있고, 분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의 의식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나와, 나 아닌 나 사이에 날카로운 분단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내가 너에게로 뛰어넘는 '나와 너' 사이에 깊은 함정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버릇은 선교 행위의 차이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선교의 객체일 뿐입니다. 또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경우에도 나는 시혜자로 주체이고, 너는 수혜자로 객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선교행위는 곧 정복이라는 행태와 본질상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독재자를 향한 투쟁과정에서 이런 이원적 사고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요 너는 비크리스천이라든지, 너는 고난받는 자요 나는 너를 돕는 주체라는 사고는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잘못된 사고의 틀입니다.

서구에서의 이같은 사고의 틀은 '인격'(persona)이라는 개념이 문제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격이란 결국 에고(ego) 또는 인디비디움(Individium)과 동의어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라이프니츠(Leibniz)의 모나데(Monade, 단자) 개념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나'의식에 바탕을 둔 이 개념을 신에게까지 적용을 합니다. 그러므로 서구 그리스도교는 유일신사상을 극대화하고 마침내 기독교를 절대화함으로써 다른 종교와의 공존이나 대화의 길을 차단해버렸습니다.

극동의 사고에서는 '나'에 대해서 '우리'가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나와 너'는 '우리'안에서 해소되고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영어나 독일어의 'We'나 'Vir'와는 다릅니다. 이것은 복수의 개념이 아니라 '한울타리'라는 어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란 말은 운명공동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어원은 물론 가족제도에 있습니다. 아직도 이 말이 사회에서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와 너' 사이의 주객도식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반성은 민중과 함께 살면서 점점 분명해진 것들입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서구적 사고에 영향을 받은 나의 의식과 줄곧 싸워야 만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관계의 담을 헐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사이의 담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갔습니다. 하느님은 그 이상 나의 객체가 아니라 하느님과 나는 '우리'안에 하나임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살리기 위해서 '너와 나의 만남'을 사건이라는 말로 파악했습니다. 민중과 나의 만남은 하나의 사건을 일으킵니다. 나와 하느님의 만남도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의 사건과, 예수와 민중의 만남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오늘의 민중사건 속에 예수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신학의 과제는 민중의 사건 속에서 예수의 현재적 사건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 Evangelische Kommentare(1987년 1월)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