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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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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민중신학의 방법론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시각에서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진행되고 있는 민중신학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사회정치경제적 시각에서 민중의 위상을 정립하는 방법

② 민중의 삶과 그 문화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길,

③ 성서에서 그 정당성을 묻는 길 등입니다. 물론 ① ②의 두 방법도 귀결은 ③에 도달합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는 그 ③에 관해서 간단히 소개하려고 합니다. 즉 성서의 어디에서 민중신학의 근거를 찾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역사를 비판하는 방법의 결과를 존중합니다. 따라서 양식 사적 또는 편집사적 방법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양식사적 방법에서 곧 어떤 결론을 끌어내지 말라는 것이고, 편집사적 방법은 그것에 머무르지 말고 그 결과가 비록 가설에 지나지 않더라도 역사적 예수와의 관련 속에서 어떤 대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는 두 방법 모두에게 큰 약점이 있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회사적인 관찰의 결여입니다. 저는 편집사적 작업을 사회사적 고찰로 보완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른바 '역사주의'를 거부합니다. 까닭은 이론바 객관적인 관찰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의 오늘의 삶은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우리는 역사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해석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만일 과거의 역사가 현재적인 것을 조명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비판학적인 방법으로 단지 케리그마의 분석에 머물러버린다면 그것은 결코 충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른바 우리는 '케리그마적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에 성육화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노력과 역사의 예수를 묻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한 방향설정을 바로 민중신학의 목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갖고 우리는 신약, 특히 공관복음서를 탐구했습니다. 그 결과로 다음의 사실들을 새로 발견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1. 예수를 둘러싼 군중은 우리에게 아주 크게 부각됐습니다. 우리가 신약을 그저 그리스도론적인 전제를 갖고 읽은 시절에는 이 군중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형태없는 배경으로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더 선명하게 하는 역할 이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군중은 그림자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현장에서 민중을 발견한 후부터는 바로 이 군중 이 우리에게 아주 다르게 비쳤습니다.

마르코복음 편자는 이 군중을 고유하고 이색적인 말로 표시했습니다. 이 단어는 바울로서신에서도 그리고 신약 전체의 다른 편지들에서도, 나아가서는 셉두아긴타(LXX)에서까지도 별로 사용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오클로스(ὄχλος)입니다. 셉두아긴타는 이스라엘 또는 '하느님의 백성'을 라오스(λαός)로 표시했지, 오클로스로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클로스란 표현은 독일 말로는 군중이라거나 어쩌면 민중(Pöbel)으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영어 로는 crowd가 적합할 것입니다.

오클로스란 어떠한 소속성도 없는 사람들, 따라서 권리와 의무가 없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가령 노예나 고향을 잃은 방랑자, 거지, 이족(異族), 고용병 등등이 이에 속할 것입니다. 인권이란 그들에게 해당되지 않고, 그들 삶에는 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왜 마르코는 예수를 싸고도는 군중의 표시를 바로 이러한 뜻을 가진 오클로스로 표시했는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명한 이유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까닭은 그도 오늘의 '국민'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라오스란 단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오스냐는 마르코에서 오직 두 번만 사용됩니다. 한 번은 셉두아긴타에서 인용한 문구에서(마르 7, 6), 또 한 번은 예수의 적대자의 입에서 나옵니다(마르 14, 2). 그러므로 나는 오클로스로 표시되는 이 군중을 분석해보았습니다. 그 결과를 나는 논문으로 발표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성격을 서술하는 것을 생략합니다. 그저 이런 정도의 말은 할 수 있겠지요. 오클로스라는 개념은 우리의 말 민중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이로부터 우리는 예수를 오직 민중과의 관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민중을 빼고 보는 예수는 어쩔 수 없이 형이상학적인 그리스도론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민중이 있고 민중이 있는 현장에는 예수가 현존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가 민중을 위해 있다는 사고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는 민중과 더불어 있습니다. 우리는 민중과 예수를 결코 주객도식(主客圖式)의 틀에 넣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시각에서 나는 갈릴래아의 예수의 삶과 그의 십자가행에 이르기까지를 통찰해왔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한 개인으로서의 예수의 처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동시에 고난당하는 민중의 처형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이른바 '케리그마적 신학'에서는 복음서는 확대된 케리그마 이상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바로 복음서에서 바울로저인 의미의 그리스도론만을 읽어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많은 구체적인 사건들, 그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 그의 행태를 도외시해버리고 그저 케리그마적인 말만을 텍스트로 수용합니다. 바로 불트만의 『예수』라는 책이 그렇듯이, 우리는 이러한 방법이나 주장을 절대로 거부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복음서를 한 개인으로서의 예수의 전기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서를 '사회의 전기'(social biography)라는 시각에서 봅니다. 즉 한편으로는 양식사학파들이 분명히 한 것처럼 복음서의 기록은 어떤 한 개인이 자유롭게 서술하거나 전승한 글이 아니고 공동체의 유산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집단적으로 형성됐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서에서의 예수에 대한 서술에서도 형이상학적인 본질에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의 관계에 있는 예수에 초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는 집단적인 성격이 중요한 것입니다.

 

2. 공관복음서의 언어, 특히 마르코복음이 사용한 언어는 우리에게 새로운 빛을 던져주었습니다(이 점에 관해서는 독일 학자들의 언어학적인 연구결과가 우리에게 결정적인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이 사용한 언어는 바로 민중의 언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로에 새로운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언어학자나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이야기 형식'이 민중언어의 특징이라고 봅니다.

우리 역사의 마지막 왕조인 이조 500년(A.D. 14~19세기) 동안 한문언어가 공적인 언어로 사용됐습니다. 이 용어는 오직 지배자의 언어로만 유효했습니다. 저들도 일상생활에서는 그들의 고유언어를 사용했으면서도 관료의 기능을 발휘해야 할 때에는 한문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한문언어는 물론 중국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자도 물론 중국어였습니다. 한편 이에 대해서 상인(常人)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로 입에서 입으로 전승됐습니다. 그 양식은 물론 이야기체입니다. 아직도 문서화 되기 이전의 이야기 등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한국의 고유성을 새롭게 발견해나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삶의 일부가 아니고, 삶의 전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들을 꿰는 사슬과 같은 것이고, 논리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민중언어를 우리는 공관복음서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납니다. 서구의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비유들이 예수의 전형적인 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들이 이야기들이고 내용을 보아도 전형적인 민중언어입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민중들도 예수의 언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질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바울로나 요한의 언어는 상당히 논리적으로 전개된 것으로서 우리 민중의 귀에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으로 들립니다.

이렇게 볼 때에 결과적으로 우리가 거의 일생을 바쳐서 배운 서구 신학에 대해 아주 회의적이 되었습니다. 신학에서의 주지주의인 헬레니즘적 경향은 참된 예수의 실상에 대해서 소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같은 판단을 배경으로 우리는 헬레니즘적 영향을 제외한 성서의 언어를 발견하고 배우기 시작하는 한편, 우리의 민중언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민중언어와 성서의 언어가 놀랄 만큼 유사한 것을 발견했으며, 따라서 성서언어로 민중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높은 것을 인식했습니다.

현영학은 한국의 민중언어에 몰두했는데, 특히 우리 민중의 이른바 '마스크(탈) 마당극'에 관심했습니다. 이조 500년 동안 민중은 저들의 생각을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분노가 폭발 하면 그 결과가 얼마나 가공할지를 알고 있는 지배층은 가끔씩 저들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발산할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 둘은 후환이 두려워 마스크(탈) 뒤에 자신들을 숨기고 자기들의 상징적 언어로 지배자들을 조소하고, 지배층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행위나 언어로 촌극을 꾸며 저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한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해내려온 '마스크 마당극'을 통해 저들의 '한'과 아픔 그리고 불만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극적인 것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감춰진 그들의 희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3. 우리의 가장 특징적인 민중의 노래는 대개가 한국 남단의 한 지방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방 사람들은 이미 천여 년 동안을 지배자들에게 차별대우를 받았는데, 특히 군사정권이 들어선 지난 30년 동안 더 십했습니다. 그런대 그 민중의 노래에서 우리는 저들의 '한'을 가슴 아프게 체험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는 지난 수십 년간의 경험에서 지정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성서의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사이의 상반된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중요하게 부각됐습니다.

갈릴래아는 민중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난의 과거를 가진 갈릴래아는 예루살렘의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지방에는 이른바 암 하 아레츠(Ám hā´ āres)로 차 있었습니다. 마르코는 이들을 오클로스라고 이름붙였는데, 저들은 바로 예수와 함께한 자들입니다. 또한 갈릴래아는 로마제국의 저항집단인 젤롯당들이 마지막 한 명까지 죽으면서 싸운 장소입니다. 저들은 굶주리고 병들고 고립됐어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싸웠습니다. 일찍이 로마이어(E. Lohmeyer)가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의 갈등을 발견했고, 마르크센(W. Marxen)도 『마르코복음』에서 이것을 재론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아주 중요한 점을 간과했습니다. 저들은 둘의 갈등을 종교적, 정신적 측면에서 보았을 뿐 그 갈등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배경을 아주 무시해버렸습니다.

마르크센은 마르코복음 14장 28절, 즉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 후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한 말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 데 대해, 나는 마르코 1장 14~15절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마르코 1장 14절은 편집구라고 하여 가볍게 처리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르코는 갈릴래아를 단순히 지리적 이름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아니, 예수가 등장한 정치현장이라는 데 더 의미를 둡니다. 마르코복음 1장 14절은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후 예수는 갈릴래아로 가다.

예수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것과 때를 같이해서 그의 공적 활동을 위해 갈릴래아로 갔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바로 갈릴래아의 통치자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투옥한 바로 그 통치권에 들어 갔다는 사실이 지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그렇게 총명한 서구의 성서연구가들에게는 그것이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만일 민중이 체포, 투옥되는 와중에서 민중신학을 시작하지 않았던들 이 구절에 무심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왜 갈릴래아를 그의 활동무대로 선정했느냐 하는 물음을 쉽게 넘겨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갈릴래아가 젤롯당의 거점이 됐다는 사실도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싸고돈 오클로스와 젤롯당원들의 역사적 관련을 주목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사이의 관련에 대해서도 주목했습니다. 갈릴래아는 역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스라엘 북왕국에 속해 있었고, 예루살렘은 남유다국에 속해 있었습니다[이 점에서 특히 G. 멘더홀의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1962)와 N. 갓월드의 "The Tribes of Yahweh"(N.Y., 1979) 등이 잘 다루고 있다. 또한 N. 갓월드와 F.S. 프릭은 "The social world a ancient Israel"(1975)에서 특히 시나이 league와 다윗의 league 사이의 차이에 대한 탐구를 진행시켰는데, 여기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런 연구들에서 다윗왕국의 상징인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사이의 갈등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연구들에서 우리는 갈릴래아의 민중은 집권자의 권위와 정부에 대해서 예민한 대결관계에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한다면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점점 더 인식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저없이 다윗과 그 왕조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손에는 칼을 또 한 손에는 종교를 들고 국민을 통치했는데, 예루살렘의 성전이 바로 그 상징입니다. 마태오나 루가에는 예수를 다윗왕가의 후예로 시위하려는 흔적이 있으나 마르코 13장 35절 이하는 이 사실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예수의 발언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우리 양심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고, 독재체제의 진상에 대해서 우리의 눈을 열게 하고 있습니다. 독재체제란 불의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탓으로 하느님 나라와 인간의 정부 사이에는 언제나 투쟁이 있어왔으며,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민중은 언제든지 하느님 나라에 반하는 독재체제에 대해서 저항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언제나 민중들과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민중과 밀착해서 살던 예수는 그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지리적 갈릴래아는 이러한 공동체 관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예루살렘은 예수에 대한 거부를 상징합니다. 저들은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고, 예루살렘에 기득권(Status quo)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다윗의 권좌인 예루살렘은 하느님과 대결한 폭력적 권좌의 상징입니다. 예루살렘은 언제나 외세에 의해서 지배를 받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예루살렘과 그 거주민들은 언제나 지배자의 편에 섰으며, 지배자와 밀착하여서 민중을 멸시하고 착취했습니다. 저들은 성전에서 각종 정결법과 규정 등을 통하여 민중을 착취했습니다. 성전은 사실상 야훼를 가둔 감옥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하느님의 집'이라고 선포한 것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마르코복음 14장 28절아나 거기에서 연유된 마르코복음 16장 7절은 이러한 예루살렘의 성격을 고려할 때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의 민중과의 재회를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바로 갈릴래아에서할 것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갈릴래아에서의 재회가 바로 예수의 내림(來臨)을 말하는 것이고,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우리의 정치적 상황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우리의 내림에 대한 기대도 그만큼 열렬해지고 있는 경험에서 이런 동의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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