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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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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교회사적 반성

이조(李朝)가 극도로 피폐됐을 때 그리스도교가 들어왔는데 그때 몰려든 사람들을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① "관리들의 가렴주구와 탐학을 피하여 새로운 무엇을 기대한 민중"(『독립신문』 1899년, 『황성신문』 1901. 5. 3).

"민중이 관리의 람학에 고통하여 계속 그리스도교에 입교해서 세례받은 자가 4, 5만 명"(『황성신문』 1901년).

② 관료(縉神)들, 즉 개화파 민족주의자들이다. 즉 의식화된 '민족' '민중'이 살 길을 찾아 그리스도교에 몰려왔다.

청일전쟁 후 신도가 급증하고 동학이 진압된 후 그리스도교의 문을 두드린 자가 많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에 기대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들은 무식한 민중이다. 나라를 잃은 지 10년째 되던 해 궐기한 31봉기의 절대다수가 무식한 계층이었음이 확실해졌다. 총독부 발표에만 피검자 1만 9,525명 중 17.7퍼센트인 2,190명이 그리스도교인이었다고 하며 당시의 교인 수로 보아 압도적 다수의 민중이 민족의 자주를 위한 전선에 섰다.

피검자의 31.4퍼센트가 문맹이었고 서당에서 이름자나 배운 자가 19.2퍼센트라니 반수 이상이 무식한 민중이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인의 대디수가 그런 민중이었으리라.

이들의 영원은 민중이 사람대접 받는 나라를 수립함에 있었다.

그런데 1901년 9월 장로회공의회가 「교회와 정부 사이의 교제 및 조건」이라는 결의서에서, 로마서 13장 1~7절, 딤전 2장 1~2절, 벤전 2장 3~17절, 마태오 22장 15~21절, 마태오 17장 24~27절, 요한 18장 36절 등을 들어 '민중' '민족'의 염원을 배반하고 비정치화로 맞섰는데 이것은 미국 장로회선교부 총무 브라운(A. J. Brown)의 보고에 선교사들의 훈령인 "에덴동산 이야기, 요나의 체험, 우리 주의 처녀 탄생, 라자로의 부활, 하늘나라의 진주 문과 순금의 거리 등을 사실(史實)의 역사적 기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 것에서 보는 대로 선교사들이 계속 피안적(彼岸的)인 환상의 세계로 민중을 세뇌함으로써 민족의 영원을 의식적으로 배반, 마비시키려고 했는지 극명하게 나타난다.

클라크(Clark)는 『한국 교회사』에서 "1910년대의 선교사들은 교회가 정치문제에 관련을 맺는 것을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불법한 행동에 그리스도인들이 관계하지 않도록 힘썼다"라고 보고 했다.

선교사들이 데라우치(寺內) 총독에게 보낸 글에 "기독교가 반란 선동의 소굴이라고 지정된 감을 주는 것은 선교사로서 선교상 다대한 이해관계에 있다…… 우리 교리역원 및 교사에게 권세에 복종함을 가르치고 교회는 정치운동에 간여함을 허락치 않았다"고 씌어 있다.

그보다 전인 1901년 장로회공의회의 의결을 보면 "교회는 성신의 부친 교회요 나랏일 보는 교회 아닌데 예배당이나 회당사랑이나 교회회당은 교회일을 위하여 쓸 집이오. 나랏일 의논하는 집은 아니오…… 누구든지 교인이 되어서 다른 데서 공론하지 못할 나랏일을 목사의 사랑에서는 더욱 못할 것이오"라고 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교회로 모이는 민중의 민족적 염원이 반영되는 반면 선교사 중심의 교회지배층은 이에 반하는 입장을 고수했다는 증거들이다.

교회의 민중은 역사적 염원에 끓는데 선교사들은 역사현실 망각의 지대로 이끌려고 했다. 그러나 31봉기는 이러한 지도이념을 박차고 일어난 것이다.

31봉기 이후 교회는 이 민중과 더불어 민족을 위하는 길을 가지 않았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안창호, 이광수, 이동휘, 여운형 등이 모두 교회에서 나갔다.

그후부터 교회는 이 민중의 염원에서 단절된 기형아로 있다가 해방을 맞고 625를 겪고, 419를 만나고 516을 당하는 동안 완전히 민족에게서 잊혀진 한 종교적 이기주의 집단으로 조소의 대상이 됐다.

교회가 얼마나 세상을 의면했나하는 것은 1925년 이 나라에 장차 교회를 짓밟을 서울신사(神社)가 서고 민중을 미끼로 전체주의를 구축하는 공산당이 창당됐는데도 그것에 대한 일언반구의 반응조차 없었다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 결과는 1938년 장로회총회에서 꼼짝못한 채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주기철 등은 투옥되었고 장대재교회 등은 폐문됐으나 민중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왜? 종교적 이기주의자들이 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꼭 자루에 담은 모래알 같았던 것이다.

이러한 민중과 민족사에서 단절된 상태에서 독재의 횡포에 눈을 떠서 고난 속에서 민중을 발견하고 민중을 억압하고 민족의 염원을 정권욕으로 유린하는 권력에 도전하게 된 지난 1970년대의 기독교 장로회의 선구적 역할은 하느님이 인도한 길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없다.

이렇게 해서 악한 세상에 대해서 눈을 뜬 우리를 다시 재울 수는 없다. 이제는 이 길을 계승하여 우리의 고백이 돼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의 신앙고백선언서는 그 서론에서 "한국에서 부름받은 우리"라고 잘 지적했다. 그러나 그 신앙고백하는 현장인 이 나라, 이 겨레, 이 민중의 자리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했다. 이 신앙고백은 세계교회를 향한 문은 열었으나 우리 민족, 우리 민중과의 연관성이 없다. 우리는 그러므로 그 다음 단계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