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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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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소그룹의 크리스천들은 예수에 관한 케리그마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예수를 따르던 민중들은 자기들이 예수에게서 받은 충격을 전했다. 공식적으로 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우리가 말하는 '루머'나 '유언비어'의 형태로 전했다. 유언비어는 조작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 가장 진실한 형태의 말이며, 정보이다. 예수에 관한 '루머'는 소수의 민중 들에 의해서 줄기차게 전해내려왔다. 당연히 이 루머는 케리그마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런데 제도화된 교회에서는 이것의 채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처음으로 대담하게 케리그마적인 그리스도론의 줄거리에 연결시켜 문서화하여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이 있다. 바로 '마르코'라는 기자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케리그마를 형성한 주체와 예수의 사건을 그대로 전한 주체는 다르다.'

케리그마를 형성해서 전해준 주체는 교회의 지도층이고, 예수의 사건을 유언비어의 형태로 전해준 주체는 민중이다. 이 민중을 대표하는 부류가 여인들이다. 고린토전서 14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은 게파에게 나타나시고 뒤이어 열두 사도와 500명의 형제와 주의 형제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신다. 이들은 전부 교회의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여기에 여자는 쏙 빠져 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교회의 지도자였던 예수의 제자들은 미련하고도 눈치없는 멍청이들로 나타난다. 예수가 죽으러 울라가는데도 한자리할 생각들만하고 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예수는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그들은 졸고만 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자 모두 줄행랑을 치고 있다. 마르코의 보도에 의하면 끝끝내 남은 자가 누구인가? 여인들이다. 여인들은 전형적인 민중의 상징이다. 교회지도층의 케리그마와 민중들의 예수에 관한 유언비어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런데 교회를 배경으로하고 있는 마르코가 이들을 다 살려내는 노력을 한 것이다. 마르코의 노력으로 우리는 민중들이 줄기차게 전해준 이야기, 예수가 어떻게 살았고, 왜 죽었는가 하는 내력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서구의 신학은 색맹처럼 이런 점들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점을 볼 수 있게 되었는가? 한국의 민중을 만남으로 인해 성서 안에 있는 민중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장이 이 사실들을 보게 해주었다.

마르코복음에는 케리그마에서 발견되지 못한 '오클로스'(ὄχλος)가 나온다. '오클로스'는 예수와 같이 움직인 민중이다. 예수는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살았다. '오클로스'가 있는 곳에는 예수가 있었고 예수가 있는 곳에는 '오클로스'가 있었다. '오클로스'와의 불가분리의 삶이 예수의 갈릴래아에서의 삶이었다. '오클로스'와 예수에 관한 유언비어는 지식인의 눈에는 무가치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병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이야기들을 지식인들은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겼다. 바울로의 서신에도 예수가 기적을 베풀고 병 고친 이야기는 없다. 이것은 예수의 이야기, 비유 들은 민중의 언어였다는 좋은 증거이다.

마르코는 이 '오클로스'를 38회나 사용하고 있다. 마르코가 기록 한 '예수와 오클로스'의 특징은 예수의 '오클로스'에 대한 '무조건성'(unconditional)에 있다. 예수는 '오클로스'에게 '나를 믿느냐?' '너 회개했느냐?' '너 다시는 그런 일 않겠느냐?' 하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준다.

마르코복음은 위와 같이 민중과 예수의 관계를 만들다가 결국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음을 말한다.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는 병을 고치는 초인적인 분이었다. 그런데 마르코의 수난사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을 본다. 마르코복음 14장 이하를 분석해보면 예수의 자연적인 모습, 종교적인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철저하게 악과 부정과 모순이 지배한다. 게쎄마니 동산에서부터 예수는 "왜 하느님 나를 버리시냐"고 절규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중의 현장과 꼭 같다. 이른바 종교적인 책을 쓰는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너무 안쓰러워서 루가는 이 부분에서 천사가 잠시 등장해 예수에게 힘을 돋워 주었다고 보고한다(22, 43). 이것이 예수 죽음의 사실적인 권징이다. 바로 민중의 현장이다. 여기서 민중과 예수, 오늘날 민중과 예수 당시의 민중 사이에 공동의식이 생겨난다.

마르코가 복음서를 쓸 때는 유다전쟁(A.D. 66~70년)이 일어나 비참한 경지에 처해 있을 때이다. 예수가 5천 명에게 음식을 먹인 이야기가 있다. 5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사흘씩이나 굶어가며 예수를 따르고 있다. 예수는 이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하다고 하셨다(6, 34). 이것이 바로 그 당시의 상황이다. 모두 다 집을 잃고 팔레스틴에서 쫓겨났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암흑의 상황이다. 이 죽음과 암흑과 절망의 상황에서 마르코는 예수의 수난사를 쓰고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마르코의 창작이 아니다. 민중이 전한 처절한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서 마르코는 희망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더 구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15, 34) 하는 대목에서, 버림을 받되 철저히 받고 있는 예수가 그래도 "나의 하느님"이라고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고 부르는 장면에서 마르코는 믿음의 본질을 본다.

이렇게 처참하게 죽은 예수가 부활한다. 예수는 14장 28절에서 내가 살아서 갈릴래아로 갈 테니까 거기서 만나자고 예언한다. 이 예언은 8장, 9장, 10장에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마르코는 예수가 살아서 자기를 모든 이에게 나타내 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르코는 예수가 나타났다고 하지 않고 빈 무덤의 이야기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유일한 증인들인 여인들이 안식일 다음날에 예수의 무덤에 찾아간다. 거기 가서 빈무덤을 발견한다. 이 빈 무덤 이야기는 케리그마에는 없다. 예수는 분명히 부활을 했는데도 예수는 없고 한 청년이 거기에 있어 예수의 메시지만 전해준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자렛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다.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라고 전하라(마르 16, 6~7).

여인들은 이 말을 듣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8절). 그리고 여기서 마르코복음은 끝난다. 왜 마르코는 마치 미완성의 교향곡처럼 복음서를 끝내고 있을까? 왜 마르코는 더 부연해서 갈릴래아에 예수가 나타나셨다는 말을 하지 않고 끝냈을까? 그러나 여기에서 마르코의 신학을 들을 수가 있다.

마르코는 부활의 케리그마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부활한 예수의 나타나심에는 새까맣다. 지금 마르코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과거가 어떻단 말이냐? 마르코는 과거의 부활한 예수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 만나자는 약속으로 복음서를 마치고 있다. 어디서 만나느냐? 아무데서나 만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더불어 살던 민중의 현장인 갈릴래아에서 다시 만나자고한다. 바로 민중의 현장인 갈릴래아에서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약속과 희망을 놓아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 마르코복음에는 교회가 없다. 예수와 오클로스와 그들의 삶과 죽음과 희망만이 있다. 그러므로 마르코복음에서는 교회론을 말할 수 없다. 또한 이것이 민중신학에서 교회론을 말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태오복음에도 민중신학적인 교회론이 없다. 마태오도 마르코의 입장을 가지고 갈릴래아에서 예수가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