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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수의 경우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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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의 경우

마태오의 산상설교의 첫 선언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5, 3)로 되어 있다. 한편 그것과 같은 근원을 가진 루가의 '들의 설교'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다"(6, 20)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둘 중에 마태오의 "마음이"는 첨가된 부분이라는 것이 정론으로 되어 있다. 이 한 구절의 첨부로써 종교윤리적 덕목이 되었다. 이처럼 마태오는 "의에 주리고"(5, 6), "의를 위하여"(5, 10) 등을 첨가해서 같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이 의도 적임은 그의의 루가복음에는 없는 축복의 내용이 모두 "자비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위하는 자" "애통하는 자"(종교적) 등 종교윤리적인 것임을 감안할 때 분명하며(5, 3~12), 이 축복은 이미 교회의 덕목으로 내세워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루가의 것을 원형이라고보는 것이다.

'가난한 자'란 글자 그대로 사회적인 한 계층을 말한다. 그들은 지금 굶주린 자, 지금 슬피 우는 자, 지금 미움받고 배척받고 욕먹고 억울한 누명(공정한 재판을 못 받는 자)을 쓴 자이다. 이들은 무엇을 한어떤 계층인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인자 때문에"라는 한 구절을 제외하면, 왜 저들이 슬피 울며 박해와 멸시를 받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가복음 6장 22~23절은 원래 위의 세 가지 축복과 연관이 없는 독립된 것이며, 그중에도특히 "인자 때문에"는 첨가된 부분이다.

한편 '가난한 자'란구체적으로 '지금' 굶주린 자, 지금 슬피 우는 자이다. 이것은 '가난함'이 반드시 물질적 빈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박해를 받거나 힘없는 자를 포함한다는 것을 뜻한다. 슬피 우는 것은 배가 고파서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느 계층이 왜 이렇게 가난한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명이 루가복음 6장 22절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서 본 자기 해명일 수 있다.

미움받고 배척받고 욕먹고 누명을 쓰되, 어쩔 수 없는 계층! 이것은 한마디로 그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가난한 자들을, 예수가 위하고 또 예수를 따르 던 갈릴래아의 민중에게서 본다. 그들은 이른바 '죄인들'로 낙인 찍 힌 소외자들이다. 예수는 이 '죄인'들을 그대로 영접했고, 모든 것을 무조건 개방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편에 섰다. 그의 가르침에서 가장 전형적인 것들은 바로 그런 내용의 것들이다. 한 아버지의 비유(당자의 비유, 루가 15, 11~32), 큰 잔치의 비유(루가 14, 15~24), 최후심판의 비유(마태 25, 31~46) 등을 위시해서, 그가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 왔다는 선언은 복음서 안에 산재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예수의 갈릴래아의 민중이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다른 점은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지 않는다는 점뿐이다. 이 민중은 유다교에서 말하는 '암 하 아레츠'(Ám hā´ āres)이다(Billerbeck, R. Meyer, Percy, Dupont, Goppelt). 저들은 기존 질서를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는 계층으로서 '가난 때문에' 소외됐고, 따라서 파계자들로서 학대를 받은 것이다.

예수는 이런 계층에게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라고 한다. 이 약속(선언)은 예수 당시의 지배층에게는 혁명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다. 까닭은 예수의 이 약속은 율법으로 된 정부체제를 영원히 지속하리라고 믿는 바리사이적 유다 사회에 대해서 그들이 소외배제시킨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현실로서의 하느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다교에서도 이스라엘의 구별된 남은 자, 또는 에쎄네파와 같이 가난한 정결(율법의 측면에서)을 연결시킴으로써, 다가올 새 세계를 기다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라삐적 전통에서도 자신들을 '가난한 자'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따라서 가난은 그들의 경건과 결부된 개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가난한 자'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한다.

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이런 이들의 것'이라고 한다. 소유격을 사용한다. 이 말은 격려일 수는 있어도 위로가 될 수는 없다. 이 말은 장인이 버린 돌이 모퉁잇돌이 된다는 유다 격언처럼 새 세계의 주인공이 바로 버림받은 자들이라는 선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역사적 현실이라면 예수의 이 약속은 저들이 바로 역사를 짊어질 배턴을 받은 계층이라는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