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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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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 지혜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며, 권력 있는 사람이나 가문이 훌륭한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력하다는 자들을 무력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과 존재없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 26~28).

이상은 고린토교회에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당시 고린토 시는 풍요한 사회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공동체에 참여한 무리는 지식으로 보나 권력으로 보나 혈통으로 보나, 어리석고 약하고 천한 자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역시 '가난한 자'들, 하류계층의 집단이 고린토교회원의 주류였던 것이다.

이들의 '모교회'(母敎會)인 유다 지방의 그리스도인들도 어떤 부류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최고 간부인 사도라는 자들은 어부, 세리 등의 이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저들 중에는 사제족의 피를 이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고, 바리사이파나 서기관 정도의 이력을 가진 자도 없었다. 당시 엘리트의 눈에 저들은 어리석고 무력하고 약한 집단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은 몹시도 가난했다. 특히 예루살렘 공동체는 기아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교회에 호소 한 바울로의 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전 16, 1~3; 고후 8, 1~99, 1~15; 갈라 2, 10). 예수를 끝까지 따른 자들은 주로 갈릴래아에서 따라온 '암 하 아레츠'들이었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120명이 대체로 그들이라는 추측을 부정할 근거는 없다(사도 1, 15). 그들이 새로운 공동체의 구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어부였고, 바로 그들에게 예수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며, 저들을 파견하여 새 세계의 도래를 선언하게 했다는 사실을 아무런 변명도, 부끄럼도 없이 전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로는 그러한 천한 구성원을 가진 공동체를 부끄러워하거나, 아니면 기존가치와 상부하도록 변명하거나, 그것은 불행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지혜 있는 자, 권력 있는 자, 혈통이 좋은 자 등 다른 계층과 대립시킨다. 그리고 바울로는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정치적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상류신분과 하류신분으로 구분한다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후자에 속한다는 것이다(고전 1, 26~28). 그것은 우연도 불행도 아니며, 그렇다고 바울로는 유다교 일부 종파에서 볼 수 있듯이 '가난함'을 의로움과 결부시키지도 않는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철저히 구원사적으로'해석하고 있다.

바울로는 미련하고 약하고 천한 자들에 대해 '선택했다'는 말을 거듭 반복한다. '선택했다'는 말은 구약적 전통으로써 역사적 사명을 전제하는 말이다. 그럼 어떤 역사적 사명인가? 지혜, 정치적 권력, 혈통, 이 셋은 당시, 아니 현금까지도 세계의 가치체계를 재는 척도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것들과 상반되는 저 민중을 하느님이 선택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울로는 그것을 바로 기존체제에서 안정과 보장을 찾고 그것을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무력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기존 가치체제의 파괴이며, 혁명 선언이고, 동시에 새로운 세계 도래의 역사에서 주역이 이동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바울로의 이 선언은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서 일반혁명에서 보는 것 같은 복수(Ressentments)의 뜻은 없고, 기존체제가 옥죄고 있는가치체계로부터의 자유를 역설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혁명적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바울로는 하느님께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한 자들을 선택한 이유는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역사의 주인이 오직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이 공동체가 사회계층적으로는 약하나 강자를 무색하게 한다는 사실로써 증언한다는 뜻이다. 마치 그가 자기의 병을 낫게 해주기를 간구하다가 자신이 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강함이 분명하게 계시됨을 깨달았다고 하는 논리와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바로 저같은 가난한 민중을 선택했다는 의미를 약화해서는 안 된다.

이미 언급한 대로 바울로는 구원사적으로 보는 역사사건을 해석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이방인에게 구원사 성취의 주역이 주어졌다고 본다. 그것은 유다인을 포함한 전인류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바울로의 이 선언에 적용시키면, 바로 기존 권력자, 지혜로운 자, 신분이 높은 자들이 지배하던 시대는 그들에 의해서 억압되고 소외된 자들에 의해서 종말을 고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어리석음이 지혜를, 약함이 강함을 그리고 천한 것이 귀한 것을 굴복시킨다면 그것 또한 혁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울로의 이 선언은 일반적으로 일컫는 혁명처럼 단순한 사회의식이 아님은 뒤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