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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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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본래 이스라엘도 다른 어느 민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난함은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저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나라가 점점 쇠퇴하여 약소민족이 되면서 가난함 또는 약자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했다(여기서 '역사적'이란 하느님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외세에 짓밟혔을 때 이 민족의 가난하고 비참함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역사적(동적) 사명을 찾은 것이 제2이사야였다(이사 41, 1749, 1353장). 즉 제2이사야는 비록 외세에 의해 침탈당한 이스라엘은 약함, 수난당함 그리고 패배의 상징처럼 되어 승자에게 조소거리가 되었으나, 바로 그것이 이 역사의 온갖 죄악을 대신 짊어지도록 선택받은 표정이라는 역사적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포로생활과 더불어 하느님과의 계약이라는 관계 개념에서 율법준수를 신앙생활의 중추로 삼으면서부터는 '가난한 자'와 종교적 그룹 안에서의 율법준수자(이들은 '건전한 자' 또는 '의로운 자'로 불렸다)를 결부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난함 자체가 종교적, 율법적 개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카베오 가문이 유다전쟁(B.C. 165년)에서 승리한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난한 자'를 위해 싸운 그들은 '부한 자'가 되었고, 그에 따라 '가난'이라는 개념도 종교적 의미와 결합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래도 완전히 정치적 의미를 지녔던 이 개념이 바리사이파시대에 와서는 완전히 율법과 결합된 종교적 개념이 되고 말았다.

반면 구약에는가난한 자에 대한 약속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데, 그것은 계약의 전통 안에 포함되어 있다. 즉 구약에서는가난하고 눌린 자의 해방과 저들의 고유한 사명('가난한 자')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그리고 특히 시편에 그런 내용이 많다.

야훼여 당신은 미약한 사람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 마음 든든하게 해주시옵니다. 귀를 기울이시어 억눌린 자, 고아들의 권리를 찾게 하시고……(시편 10, 17~18).

이것은 잃었던 권리를 찾아주리라는 것이다(82, 2~4 참조). 그것은 바로 가난한 자들에게 준 야훼의 약속이다(74, 19 이하). 이 약속 안에서 가난한 자의 축복은 권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약속의 성취는 때가 와야 한다. 그때가 새로운 하느님의 통치의 때이다. 시편 72편은 그런 뜻을 대표한 것으로서, 이 새로운 통치의 구체적인 것은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며 그들에게 권리를 찾아주는 것임을 반복하여 말한다. 또한 하느님의 새로운 통치를 실현할 존재를 '메시아'라고 한 것이 이사야 11장 4절, 즈가리야 9장 9절 등에 나타나며, 그가 와서 가난한 자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 종말적 계약의 약속이라는 사상이 제2이사야에 반복된다(이사 41, 1749, 1351, 2154, 1166, 2).

이런 가난한 자의 개념 전승의 맥락 속에서 예수는 '가난한 자'가 하느님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가난한 자'를 종교논리와 결부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바리사이파적 유다교에서 볼 때에는 이단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단순히 선언한 것이 아니다. 그가 싸고돈 무리나 그의 가르침에서 보면 이 특징이 뚜렷하다.

그의 '가난한 자'는 정치사회적 개념이다. 루가복음은 가난한 자를 이런 측면에서 이해하여, 가난한 자를 부한 자와의 대립개념으로 파악하고 부자에 대한 저주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와 나자로를 대립시킨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적 해석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는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의 편에 선 것이라고 하면 맞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의 주제가 하느님 나라 도래인 것은 다 아는 바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도래한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미래'이지 인간의 유토피아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휴머니즘에서 출발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혁명이 결과적으로 그들이 설정한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고 마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예수에게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전통적 계약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제 그 약속의 때가 왔다고 본 점이다. 이 점에서 루가는 이사야와 예수의 행태를 결부시켰고, Q자료인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마태 11, 4 이하) 등에서도 '약속과 성취'라는 의식에서 예수의 출현을 이해했다. 그것이 바로 찬(滿) 때, 카이로스(καιρός)이다. 그것이 와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선포함과 동시에, 이미 그때가 도래한 듯이 자신은 가난한 자의 편에 섰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조건도 없이 그들에게 개방적일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 바울로의 경우는 다르다. 바울로는 이미 새로운 그리스도 공동체를 전제하고, 거기 들어온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구원사적 해석을 한다. 이제 여기서 '가난한 자'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로에게는 하느님 나라 도래의 임박성이 후퇴하므로 교회란 것의 비중이 커지고, 이에 따라서 가난한 자는 교회 안과 밖으로 분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바울로에게 있어서는가난함과 경전함이 연결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바울로에게는 그리스도인 이외의 가난한 자 일반에 대한 존중과 평가가 없다. 말하자면 그는 '이스라엘'의 자리에 그리스도인을 대치시킨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가난한 자를 말할 때에는 구약에서 나약한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야고보서는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이미 지적한 대로 야고보서는 복음서, 특히 루가의 입장을 재현한다. 그러나 야고보서도 이미 교회라는 조직체가 형성된 입장에 있으므로 '가난한 자'를 두 계열(교회의 안과 밖)로 나눌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바울로와 같으나, 야고보서는 교회의 안과 밖을 막론하고 '가난한 자'의 편에서 세상의 부요한 자를 경고, 고발한다(야고 5, 1~4).

야고보서가 특히 부자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권력으로 재판을 악용한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교회에 접근하는 부한 자를 특대하는 것을 책하는 것은 그러한 추세에 대해 반감으로 차 있음을 말한다. 이런 계급적 증오심을 노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야고보서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를 대립과 증오를 통한 혁명을 시도하는 마르크스주의와 가장 유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는 복수심을 조장시켜서 혁명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편지의 처음 구절 "낮은 처지에 있는 형제는 하느님께서 그를 높여주신 것을 자랑하고, 부요한 형제는 자기가 낮아진 것을 자랑하시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지향하는 바는 뒤집어엎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다. 이 평등은 강제로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거듭 부에서 어떤 삶이나 힘의 보장을 찾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역설함으로써 스스로의 결단을 촉구한다(1, 115, 1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