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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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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본인은 「민족통일문제의 성서적 조명」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은 시각으로 민족분열의 원인을 밝혔다.

초기 이스라엘은 부족동맹으로서 비군주적 공동체체제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체제에 가까웠는데, 이 부족동맹이 가능했던 것은 야훼 하느님을 절대의 그리고 유일한 통치자로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안 지역의 군주체제에 매혹된 일부 세력이 국가안보라는 차원에서 부강한 나라를 이상으로 내세움으로써 이스라엘을 군주체제로 만들려는 책동을 계속해왔다. 그 결과로 사사(판관)시대의 종말을 가져오고 군주체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체제에서 사울이 첫 왕으로 등장했으나 그는 과도적인 인물이었고 무술과 지략이 뛰어난 반디트(Bandit, 산적비적)의 대장인 다윗이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손안에 넣기 위한 갖은 획책을 꾸몄다. 그러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스라엘의 숙적 불레셋과 야합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서 먼저 유다 족속의 왕이 되고, 불레셋과의 싸움에서 사울이 죽은 다음 약화된 이스라엘과 투쟁을 계속하여 무력과 권모술수로 마침내 통일국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국호의 동일이지 민족의 통일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에 권력의 상징인 궁전을 짓고 통치자로 군림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신앙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함으로써 마침내 그의 아들 솔로몬왕 대에 와서 성전을 세우고 우주의 신을 성전의 신으로 만들어버리며, 이 성전의 신을 다윗왕조의 수호신, 즉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키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만유의 통치자 야훼를 사람이 지은 집에 감금하고, 다윗왕조를 수호하는 신으로 하는 그런 이데올로기로서의 신학을 펴게 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민족 사이에는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대립은 날로 심화되어 마침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민족이 분단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군주적인 현장에서 예언자라는 일군(一群)들이 일어나서 온갖 비리에 대항하며 생명을 걸고 군주들의 학정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들을 귀가 없어 마침내 힘없는 민족으로 북과 남할 것 없이 외세에 의해 분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살핀 나는 민족의 통일은 결코 집권자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 되며, 오히려 분단의 책임은 집권자들에게 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통일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예수가 등장했을 때에는 여러 신흥제국들의 정복을 거쳐서 세계제국이 된 로마제국의 식민지시대였다. 이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가장 큰 과제와 적국의 점령하라는 암흑 속에 있으면서도 안으로는 민족내에서 정신적인 분열을 겪고 있었다. 첫째, 특히 이스라엘에 뿌리를 둔 갈릴래아 지방, 사마리아 지방,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지방 사이의 갈등이었으며, 둘째는 로마의 어용 괴뢰정부인 헤로데왕, 셋째는 예루살렘파가 문제였다. 저들은 특히 성전에 대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역대로 외세에 아부하여 하느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을 팔아 사복-을 채우면서 이스라엘민의 대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체질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위한 여러 형태의 운동 집단이 있었다. 이미 마카베오전쟁 전에 이른바 예루살렘 지도층의 부패를 용인할 수 없어 탈예루살렘하여 백이숙제처럼 자신들의 경건을 훈련하는 신앙동지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시딤이다. 저들은 마카베오 일가가 독립전쟁을 일으켰을 때 과감히 참여하여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마카베오 가가 권력을 잡자 또다시 무력지상주의에 빠져 민족 위에 군림하며 군주체제를 만드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었던 사람들이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예루살렘 숙청을 염원한 것이 에쎄네파이다. 이 에쎄네파의 정신에 준한 그룹으로 세례자 요한파가 있고, 젤롯당도 그 맥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현실주의자들로서 외세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현장에서 민측오 동을 통하여 정신적 무장을 하는 것이 옳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해야 한다는 그룹이 있었다. 그 중추가 바로 바리사이파이다. 저들은 율법을 토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일상의 생활규율을 만들어 민족운동의 기틀로 삼았다. 그러나 저들은 여권에 수용됨과 동시에 정권의 세력을 등에 업은 체제주의자들로 되어버렸다. 저들은 하느님 율법의 이름으로 체제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중산층 이상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날 그날의 끼니를 염려하는 사람이나 병자나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준수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 체제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죄인'과 '의인'이라는 종교적 아름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체제 안에서 체제의 의무를 다하는 자는 의인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죄인이라는 현장에 예수가 등장한 것이다.

예수의 행태에서 민족통일을 향한 직접적인 대답을 찾을 근거는 내세우기 어렵다. 그 대신 예수의 형태를 크게 몇 가지로 성격화함으로써 우리의 통일에 대한 방향설정의 근거로 삼아보려고 한다.

첫째, 예수 연구가들이 한결같이 놀라는 것은 예수에게서 헬레니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헬레니즘은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갈릴래아 지역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분계선에 있었으므로 헬레니즘이 만연되어 있었다. 웬만큼 배운 계층은 헬라어를 자기 나라 말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무소유를 생활원칙으로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대 자본주의에 예속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두 특성을 종합해서 우리 관심의 시각에서 성격화한다면 예수는 탈이데올로기 또는 초이데올로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점을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주는 제1차적인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74공동성명 3원칙의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서'라는 조항이 진정인가?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탈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탈블록화하는 길밖에 없다. 즉 스스로 독자적인 나라가 되는 길 밖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공산주의와 일치시킬 수도 없거니와, 자본주의 역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동시에 반공을 국시처럼 내세운 이 풍토도 극복해야 할 것이며, 자본주의를 자명으로 아는 풍토에도 저항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통일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정복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됴左는 반공에 있어서 유명한 반면에 자본주의 죄악성에 대해서는 색맹이나 다름없는 이 시점에서 자체 체질을 개선함과 동시에 이 두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제葬] 자리를 추구하는 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둘째, 예수 연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예수가 로마제국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로마에 의한 십자가의 처형사건을 빼면 로마제국과의 충돌 현장은 전혀 기록되지 않고 있다. 마치 로마제국을 몰랐던 것처럼!

예수운동을 젤롯당과 연결시키려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시도이다. 반면에 예수를 비정치적인 종교인으로 보려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주장이다. 나는 예수의 대(對)로마 자세를 탈권력주의, 권력에 대한 철저한 무시라고 보고 싶다. 이러한 흔적은 특히 예수의 수난사에서 뚜렷하다. 권력에 의해서 재판을 받고 죽으면서도 마치 하느님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에게만 호소하는 그의 자세, 빌라도 앞에서의 침묵 등이 그러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예수는 바리사이파가 중심이 되어서 이루어놓은 유다체제를 무시했다. 그의 행태는 반체제적이라기보다는 그 체제가 없는 듯이 행동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 행태의 두 번째 특징인데, 위의 특징을 민족통일을 위한 우리의 기본자세에 적용시킨다면, 어떤 기존 권력 체제도 통일운동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집권층과의 충돌을 예상할 수밖에 없는 가장 예민한 측면이다.

셋째, 예수는 오직 민중과 더불어 살았다. 그들의 애환이 무엇인지 민중의 현장에서 충분히 보며 경험하고 살았다. 그는 도시로 간 일이 없으며, 농촌으로만 다녔다. 특히 가난한 자들이 수난당하는 현장에는 예수가 있었다. 그 민중의 현장은 바로 예루살렘파들이 '오랑캐'라고 무시하며,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헤로데 안티파스의 통치영역인 갈릴래아였다. 그가 만일 정치운동을 목적으로 했다면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세례자 요한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래아로 들어가서 민중 안에, 민중 편에 서서 저들을 구속하고 저들을 멸시하는 체제와 계층에게 저항하면서 저들의 권리를 수호했다. 그러나 그는 젤롯당처럼 폭력혁명을 주도 하지도 않았으며, 바리사이파처럼 어떤 체제를 만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그가 최후에는 갈릴래아 민중을 데리고 하시딤 이래로 저주의 대상이 된 어용의 본부인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셋째 방향을 암시받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동일운동은 민족운동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수난당하고 있는 민중이 분단의 경계선을 뚫는 원동력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즉 아래에서 위로의 길이 바로 통일운동의 원칙이다.

이렇게 되는 길이 바로 민주주의의 길이다. 민이 주도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나 풍토적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민이 뜻을 모으고, 민의 진정한 소리를 내세울 대표를 뽑아 대화로부터 통일의 대과업에 임할 수 있는 길은 남과 북을 가릴 것 없이 진정한 민주 제도가 앞설 때에만 가능하다. 선민주 후통일 또는 그 반대 따위로 대결하는 것은 현실을 떠난 말장난일 뿐이다.

넷째, 예수에게는 젤롯당처럼 폭력으로 민족분단을 해결하려 한 흔적이 전혀 없다. 예루살렘에는 들어갔지만 바로 비폭력적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것은 자기 희생이라는 결과밖에 없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십자가는 분단선에서 짓밟힌 제물인 셈이다. 그가 어떤 결과를 지향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이 십자가의 사건 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오랑캐'로 대우 받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민족통일, 아니 세계통일의 거보를 내디딜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암시를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분단은 첩첩이 가로놓인 문제를 안고 있다. 이것은 처음에 언급한 대로 독일의 분단과도 아주 다르다. 민족상잔 이후에 상호간 증오와 불신을 고조시키는 역사가 40년이나 계속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이 분단선을 넘으려면 희생의 각오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늘 누가 이 분단선 위에서 죽음을 각오하며 민족통일의 절대 필요성을 중 거하겠는가? 바로 우리가 이 민족의 구원자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만이 이 일을 담당해야 한다는 철저한 각오가 있을 때 민족통일의 제단에 놓인 희생의 제물이면서 분단의 선을 뚫는 선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1985년 N.C.C. 총회 주제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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