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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수와 민중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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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와 민중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론에 사로잡힌 우리는 공관서를 읽을 때에도 한 중심인물로서의 예수만을 주목했다. 그리하여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론에 회의를 느끼면서 공관복음서를 다시 보았을 때 예수의 모습은 달랐다.

그것은 첫째, 무엇보다도 예수는 계속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처럼 교회 안에 정좌하고 있지 않다. 그는 결코 이미 완성된 존재로서 군림하지 않고, 어떤 종교적 규범에도 구속됨이 없이 자유롭게 활동한다. 이것은 하늘의 아들, 메시아, 선재적 존재, 올려져 권좌에 앉은 이 그리고 장차 심판하러 올 그리스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둘째, 그는 민중과 더불어 사는 이이다. 그는 결코 유아독존적이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그들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하면서 사는 이이다. 예수가 있는 곳에 민중이, 민중이 있는 곳에 예수가 있다.

마르코복음은 처음부터(1, 22) 그의 주변을 싸고도는 군중(crowd)에 대해 언급하며, 계속 무명의 군중이 예수와 더불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무명의 군중에게로 유도한 다음 마침내 그 군중이 바로 '오클로스'(ὄχλος, 2, 4)라고 말한다. 이로부터 예수는 그의 생애를 통해 이 오클로스에 둘러싸여 그들과 더불어 산다. 마르코복음에는 이 단어가 38회, 마태오와 루가복음에는 각기 49회, 41회가 나온다.

그러면 왜 복음서 기자들은 하필이면 이 단어로 예수와 더불어 사는 군중의 성격을 표시했을까? 70인역(LXX)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군중을 가리켜 라오스(λαός)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마르코도 이 단어를 알고 있었다. 마르코는 단 두 번 이 단어를 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구약 인용문이다. 마르코가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오클로스로 성격화한 것이 분명히 의도적이라는 것은 예수가 사귀는 사람들이 바로 오클로스가 의미하는 성격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는 많은 오클로스가 예수와 더불어 같이 행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급식 이야기에서 마르코는 그 숫자를 5천 명(6, 44)이라고 했는데, 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숫자이겠으나 얼마나 많은 오클로스가 예수 주위에 운집해 있었는가를 충분히 시사하고 있다. 저들은 이름없는 세력이다. 마르코는 그들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해서 드러내고 있다.

첫째로, 병자들이 등장한다. 마르코의 편집순서를 보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1, 21 이하34), 나병환자(1, 40 이하), 중풍병자(2, 1 이하), 손 오그라진 사람(3, 1 이하) 등의 순서로 시작하여 계속 치유 이야기들에서 병자들이 오클로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중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특별히 중요하게 자주 언급하는데, 그때 예수는 저들을 귀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귀신 쫓는 자(exorcist)로 자주 서술되어 있다.

둘째로 세리가 죄인과 더불어 민중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반영한다. 레위가 부름받는 장면이 마르코복음의 벽두에 나오는데, 이것에 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레위 집에서 식사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 15).

이 구절은 Q자료에도(마태 11, 19; 루가 15, 1) 나온다. 마태오는 "세리와 창기"라고 하며 세리를 예수의 민중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민중이란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임을 나타낸다. 세리, 창기, 죄인 등 모두 소외층다.

셋째, 민중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호이 프토코이(οί πτωχοί)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다. 우리는 가난의 에토스(ethos)를 빼고 예수를 생각할 수 없다. 특히 루가복음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부각되며, 가난한 자를 부자와 대립시킴으로써 성격화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넷째, 특별히 지적해야 할 것은 여인들의 등장이다. 병자로서, 가난한 자로서 여인이 여러 번 나오지만, 무엇보다도 예수의 수난을 끝까지 지켜본 자들로서, 그리고 빈 무덤의 목격자로서 여인들을 언급한 것은 예수를 따르는 민중에서 여인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예수와 오클로스」, 『민중과 한국신학』 참조).

여기서 그리스도론과의 관계에서 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예수와 오클로스의 관계이다.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은 하느님의 드라마에서 예수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예수는 하느님의 의지(뜻)에 순종하고 그것을 실현했다는 의미에서 참된 메시아였다는 것이다. 복음서에서도 이러한 측면이 엿보인다. 수난사에서 게쎄마니에서의 고뇌와 십자가 상의 절규 등이 그러한 예수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예수의 모습도 전승되어 있다. 그것은 수난당하는 민중의 소원과 절규에 순응하는 예수이다. 그것은 특별히 치유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병을 고치는 예수는 결코 이미 세워진 프로그램을 성취하는 자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 예수가 능동적으로 병자를 찾아가거나 계획적으로 저들을 도우려는 의지가 앞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요청은 병자 즉 민중의 편에서 온다. 그러므로 병을 고치는 예수의 행위는 병자들의 소원에 순응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의 주도권은 병자들이 쥐고 있다. 예수의 병 고치는 능력은 이 민중의 고난과 함수관계에 있으며, 민중의 의지와 만날 때 비로소 실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코는 예수가 자기 고향 나자렛에서 저들이 그를 믿지 않음으로써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6, 5)는 표현을 서슴없이 한다.

병자들,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그리고 여인들의 현장에서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소리를 하느님에게 대변하는 이가 예수이다.

이 점을 재래의 그리스도론과 구별하기 위해서 루가복음이 전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응용해보자.

전통적으로는 이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선한 사마리아 인을 예수와 일치시킨다. 이런 해석을 일단 긍정한다 해도,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었다. 그것은 이 비유가 말하는 사건에서 중심인물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를 만난 바로 그 사람이라는 점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이 수난자의 절규에 대한 반응이다. 이 절규 앞에 자신을 개방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간 자들이 사제와 레위인이었다면, 이 절규 앞에 자신을 개방한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이처럼 예수와의 관계에서 복음서에 등장하는 오클로스가 존중될 때 그리스도로서의 예수가 바로 해석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편에 서서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 편에 서서 하느님을 향한 그리스도이다. 이때 '사람'이란 막연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수난당하는 민중이다. 그러므로 민중과 더불어 민중의 편에서 하느님을 향한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 예수는 민중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다. 그는 바로 민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마르 2, 17 참조). 예수는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인가? 그렇다면 구원은 제품화된 것으로 하늘에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소리를 듣고 그것에 호응함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동 속에서 실현되는 구원을 의미한다. 이같은 사실은 루가복음이 가난 또는 가난한 자를 말할 때 잘 드러나 있다.

루가복음의 민중이해의 특징은 가난한 자를 크게 부각시킨 점일 것이다. 거기에는가난한 자가 크게 부각됨과 동시에 부자들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계급투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가난한 자를 말한 구절이나 부자를 말한 구절할 것 없이 모두 가진 자를 청중으로 삼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히 가진 자를 저주하고 가난한 자의 축복을 선언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진 자의 구원의 길이 다름 아닌 가난한 자들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역설이며, 예수 자신이 스스로 가난했으며(마태 8, 20; 루가 9, 58) 그는 가난한 자로서 이 가난한 자들 속에서만 만나질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필자의 미발표 논문 「루가복음에서의 가난한 자」에서 상술).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와 민중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를 서구에서처럼 결코 한 개인(Individium)으로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예수를 한 개인으로 파악하여 예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결국 형이상학적 그리스도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아니,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를 집단적(collective) 존재로 파악해야 한다. 즉 민중과 더불어 있는 민중으로서의 예수로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다. 마르코복음에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을 향해 오클로스를 가리키면서 저들이 내 부모요 형제라고 선언한 것(마르 3, 31 이하)은 바로 그러한 예수를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수난사의 의미도 달라진다(이 견해에 대해서는 필자의 논문 「마르코에서 본 역사의 주체」에서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