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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병에서의 해방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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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에서의 해방

첫째로 중요하게 보도된 것은 그가 병자를 병에서 해방하는 행위이다. 이 점은 특히 마르코복음에서 두드러진다. 그런데 병을 고치는 경우마다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은 교리적 측면에서 볼 때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절대로 획일적인 요구나 조건을 전제하지 않고 경우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마르코복음에 병 치료 이야기가 11회 나오는데 그중에 병 치유의 '조건'으로 '믿음'을 말하는 것이 다섯 번 나온다. 그러나 두 경우(혈루병 여인 5, 25 이하; 맹인 바르티매오 10, 46 이하)가 같은 양식인 "네 믿음이 너를 낳게 했다"로 표현되었고, 한 경우는 믿으면 불가능이 없다(9, 14 이하)는 어두로 간접적이며, 한 곳만이 뚜렷이 "믿음을 전제하고", "네 죄가 사해졌다"(2, 1 이하)라는 선언이 있는데 이것은 병이 죄값이라는 인상을 준 유일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이야기에서 조건이 된 믿음은 환자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떠메고 온 이들(복수)의 믿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다른 경우와는 다르다.

이상에서 병에서 해방시켜주는 예수에게서 어떤 교리적 조건을 찾을 수 있을까? 믿음? 죄 사함?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유일하게 죄 사했다고 한 현장은 그 환자 자신의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그 병이 그의 죄값이라고 강조하려는 흔적이 없다. 그랬다면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다침 정도가 있을 법하다.

이야기는 예수가 죄 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그리스도론으로 이동되므로 양식사나 편집사적 연구가들은 그 환자의 해방에 별 의미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당시는 그리스도 케리그마가 발달하였고 믿음이 구원의 조건으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한 때인데(바울로) 이렇게 병마에서의 해방의 조건으로 어설프게 취급할 수 있으랴?

더욱이 그 믿음의 성격을 보면 바울로의 믿음 이해와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론적 신앙이 아니라 예수가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신뢰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 과반수는 그 어떤 조건도 없고, 그저 요청에 따라서 치유해주는 것뿐이다. 그 많은 예들에서 지적할 것이 있다면 저들을 측은히 여겨 그 병마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의지 하나뿐이며, 이것이 병 치유의 근본동기이다. 그런 의지 앞에 어떤 조건도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해방운동에서 어떤 반대급부적 교리를 끌어내려는 노력은 금물이다. 가령 "네 죄를 사했다"고 하는 경우 그런 발언에서 병은 죄값이라고 연역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런 사고는 라삐 유다교적인 것으로서 바로 예수가 거부하는 것이다(루가 13, 1; 요한 9, 1 이하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같은 선언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병에 걸렸기에 '죄인'이라는 관념에서 그를 일단 해방시키는 선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그것은 "너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병자 자신에게 "너는 사람이다"라는 선언이며, 예수의 적대자들 앞에는 하나의 시위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은 예수에게서 병은 죄값이라는 전제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결코 병마의 고통에서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병마'에서의 해방이다. 여기서 '병마'라고 하는 경우(원문은 πνεμα, 마르 9, 179, 20), 병자 자신의 죄를 운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제된 포로상태에 있는 희생자라는 전제가 있다. 이 점은 특히 예수가 귀신 쫓는 행태에서 뚜렷하다. 귀신 쫓음(Exorzismus)은 예수의 행태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기존세계(체제)를 지배하는 힘의 총칭인 사탄과의 대결을 의미한다. 복음에는 그의 활동을 악마와의 대결로 표시하고 있다. "내가 하느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있다"(루가 11, 20)고 한 것이 그 단적인 표현안데, 이른바 귀신들린 자를 치유할 때의 장면은 의사와 병자의 관계가 아니라 적과의 대결을 방불케 하는 서술법을 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 악마가 싸우는 전쟁의 전선에 선 지휘자의 자세이다. 그 싸움은 바로 악마에게 사로잡힌 사람을 해방시키려는 것이지 그 병든 자의 행태―그것이 윤리적이든 종교적이든―와 관련시키지 않는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치유된 자에 대한 '후속조치'이다. 대부분의 경우 치유된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낸다(荒井 獻 지적). 이것은 '나를 따르라'라는 맥락과는 대조되는 것인데, 그것은 그 병자들이 바로 그 사회에서 '실권자'(失權者)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해방운동으로서의 치유의 성격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를 들 수 있다(마르 1, 40 이하). 나병은 '천벌'이라는 관념이 라삐 유다교에 와서 고정화됐다. 그러므로 나병환자는 자기 집과 고향을 떠나야 한다. 그들은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셈이다. 그런데 예수는 치유된 나병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그 사회의 복권절차를 밟으라고 한다. 그것은 제사장에게 치유됐다는 확인증을 받는 것인데, 그것을 위한 대가로 재물을 바쳐야 한다. 이런 지시는 예수가 유다 제사제도를 인정했느냐의 문제와 상관없다. 그것이 그 버림받은 자의 복권의 길이기에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이 사람에게 해방은 바로 제 집, 제 고향에 돌아가 함께 살 수 있는 여건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한 복권을 위해서는 종교적 고집 따위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