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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거울이 유죄?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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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한 친구의 어머니는 83세인데도 아직 팔팔하기로 이름났다. 그런데 하루는 그이가 "나는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내가 어느새 할머니가 됐구나하지, 보통 때는 새파란 젊은이로 알고 산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거울이란 나쁜 것이구나 생각했다. 실은 나도 유럽에서 10여 년 머무는 동안 내가 외국인, 그것도 황색인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이질성'을 일깨워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역시 상가에서 필요에 따라 걸어놓은 거울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은 비통하기만 하고 힘의 한계를 느껴 우울하던 저녁, 동료들이 몽땅 머리를 깎아버렸다. 한 친구가 불러온 이발사에게 머리를 내밀었는데, 염색한 머리인지라 기계가 가는 데 따라 하얀 도랑이 지며 머리칼이 제법 둔탁한 소리로 땅에 툭툭 떨어졌는데 웬지 섬뜩해졌다. 그러기로 제의한 것이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후 회라도 하는 날이면 원망을 들을 게 걱정이 돼서였다. 그런데 그중에 한 동료가 머리를 다 깎고 체경(體鏡)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이더니 자기 어릴 때 이름을 연거푸 불러댄다. 머리를 깎으니 소년 시절의 자기 모습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만큼 미숙해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여태껏 그의 머리가 그를 위장한 셈이다. 거울이 본래의 자신을 알려준 것이다.

옥에 들어갔던 한 친구의 이야기이다. 옥에 들어가 자신의 체취가 물씬 밴 '신사옷'을 벗어주고 죄수들의 옷을 갈아입었을 때, 그리고 기결 후 머리를 빡빡 깎이고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봤을 때 그 초라함에 놀라는 한편, "야, 요게 내 전부구나. 그러고 보니 어떤 권위 따위를 풍기게 한 것은 양복, 머리카락으로 꾸민 스타일, 안경 등이 만든 존엄성이었구나"고 홀로 중얼거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그에게 문제를 던진 것이 아니란다. 그와 동시에 그 감옥에만도 만 명을 육박하는 그런 수의(囚衣)의 죄수들이 있는데, 그런 이들을 자기가 과거에 얼마나 멸시했는가, 또 감옥 밖에서도 인간대우를 역시 옷을 위시한 그 풍채에서 판단해 온 자기가 폭로 된 것이 그를 몹시 부끄럽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거울의 공죄(功罪)는 병행한다. 외양(外樣)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거울은 자기에 대해 실망하게도 하지만 가상과 실상의 폭을 좁혀주어 자신을 본래의 그로 되찾게 해주게도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홀(自惚)의 여인처럼 거울을 맴도는 것으로 나날을 소모하는 사람도 있게 하는 대신, 남을 외양으로 규정해버린 잘못을 뉘우치게도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것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나하는, 남에게 주는 내 이미지에 대한 관심의 일부이다.

나는 외모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어 있었다. 사실 감옥에서 거울을 거의 볼 수 없었던 10개월 동안 아무런 불편을 못 느꼈는데, 그것은 내가 평소에 별로 거울에 관심하지 않은 탓이리라. 그래서인지 내 머리는 언제나 방금 자다가 일어난 사람 머리처럼 부스스하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바로 내 머리가 화제로 오고가는 와중에 "그게 다 자기가 선택한 멋이지. 그저 내버린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둘은 후 자기 성찰을 해보았더니 과연 나도 내 머리를 그대로 내버려두는 축이 아니었다. 아침에 세수하고는 빗질은 별로 안하지만 예외없이 머리를 내 취미에 맞도록 매만지는 것을 의식했다. 그럼 그건 왜인가? 역시 남의 눈에 '나다움'을 보이고자 하는 노력의 일단인 게 틀림없다.

가만히 자성해보면 나도 남의 눈에 비치는 나에 대한 예민성에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에서 초연하려고도 했다. 남의 눈에 비친 '나'는 나에 대한 남의 평가이다. '그 사람 멋이 있다', '못 생겼다' 따위의 평가는 거울을 향한 민감성에 포함되는 것이고,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질이 나쁘다거나 속물이라거나 위선자라거나하는 따위의 인간성과 관련된 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