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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민중과 더불어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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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중과 더불어

그러나 이 역사적 현실이 제시하는 지표는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이 '민족의 주체'에로 향하고 있다. 즉 그것은 이 민족사를 짊어지고 다음의 길을 갈 주인은 바로 '민중'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오늘의 역사의 실체는 바로 민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체적으로는 이 역사의 주역이 되어야 할 민중과 더불어 그 앞에 서 있다.

우리의 근대사(어찌 근대사뿐이랴만)에는 '민족'은 있어도 '민중'은 없었다. 이 말은 우리의 근대사는 집권자들이 '민족'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민족의 실체인 민중을 탄압하고 고혈을 빤 역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 민족도 없고 집권자만이 있어왔다. 민족의 실체인 민중에게는 오늘날에 와서도 민족적 중대문제를 결정하는 마당에는 접근할 권리가 없다. 역사적 현실은 우리의 민중만이 우리 민족 문제의 운명을 떠메어왔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저들은 주역은 고사하고 민족적 중대문제를 들을 수도 없게 소외되고 있다.

이 마당에 역사는 무엇이라고 할까? 우리는 "이 역사적 시점의 우리 민중은 무능하고 힘이 없었다" 또는 "나는 이 민중을 억압했거나 착취한 일이 없다" 따위의 말로써 이 역사의 심판에서 제외되리라고 생각하는가? 가령 악덕 기업주에게 당하는 노동자들이 참다 못하여 궐기하나힘의 한계에 부딪혀 앓고 있는 것을 보는 오늘에 사는 사람이 그 기업주의 악덕이나 규정하는 것으로 제 할 일 다했다고 하거나, 나는 그중의 어느 누구도 아니니 나는 그것과 무관하다고 빌라도처럼 자신의 깨끗함을 입증하기 위해 대야에 물을 떠다가 손이나 씻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이미 그도 역사의 죄인이다. 그가 양심을 운운하려면 그런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 자기를 부끄러워 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그런데 이 주제자체가 문제다. 엄밀히 말해서 이런 질문은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이런 질문 안에는 해야 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이 너무 벅차서 도피하려는 속셈이 언제나 작용한다.

사르트르에게 한 청년이, 혼자 기동도 못하는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레지스탕스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그 청년은 이미 갈 길을 정했으나(레지스탕스에 가담하지 않는 방향으로) 어쩐지 마음이 꺼림칙해서 사르트르에게서 자신이 결정한 일의 핑계를 정당화할 단서를 찾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 그것이 도학자적 질문이 아닌 한 언제나 구체적 역사현실에서의 결단을 위한 것인데, 그것은 질문하기 이전에 대체로 무엇이라 답해야 하는 것인지 자명하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 주제 앞에서 거울 앞에 세운 나, 남의 눈에 비친 나, 양심 앞에 세워본나, 그리고 역사 앞에 세운 나, 그 역사를 구체화해서 우리의 문제로서 민족사를 보고 결국 오늘에 와서는 민중 앞에 세운 나로서 대답은 자명하게 될 것이라는 취지로 이야기했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되도록 자기 도피의 길을 막아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자신에게 진실하면 대답은 자명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뜻을 총괄해서 두 마디로 요약하고 나의 할 일을 묻는다. 그것은 '역사 앞에 민중(이웃)과 더불어'이다. '역사'라고 쓴 말은 내가 믿는 '하느님'의 대명사이다. 그 이름으로 나를 비추어보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역사 앞에'라는 것은 역사적 현실에서 나에게 명령하는 바를 회피할 도피구는 없다는 신앙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민중은 물론 바로 '역사'의 실체다. 그러므로 민십은 나를 비추는가장 구체적인 거울일 것이다. '민중과 더불어'는 그런 뜻에서 '역사 앞에'와 '나는' 동의어일 수 있으나 '앞에서'와 '더불어'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주객의 어느 한 입장에 서서는 안 되고, 역사적 연대성과 책임성에서 '나'라는 달팽이집 같은 것에 칩거해버릴 수 없고, 오직 행동만이 있는 숙명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