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_A_6s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1917년 10월 소련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이것은 세계 노동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다. 한국에도 이 바람은 불어왔다. 3 1운동 이후, 즉 1920~30년 사이에 노동쟁의가 891건이나 발생했으며 그 참여자수는 7만 3,450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노동쟁의의 76퍼센트가 임금문제였다. 1920년에 이미 조선노동공제회가 성립되어 불과 2년 만에 1만 5천 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그해 10월에는 13개 노동자단체가 연합하여 회원 3만 명을 확보하였다. 1924년에는 260개 단체가 가입하여 회원 5만 3천 명을 수용하였다. 이것은 1919년에 노동자수가 4만 2천, 1928년에 8만 8천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절대다수의 참가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때 노동자들의 조건은 새삼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데, 대우에서 일본 노동자들과의 격심한 차이가 상대적인 분노를 일으켰다. 1925년은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해이다. 그해에 고려공산당이 창당되었고, 서울 남산에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이른바 조선신궁이 건립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했는가?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장로교의 기관지에 해당하는 『신학지남』은 이런 사실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선교사가 이끄는 한국 그리스도교 지배층의 폐쇄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교회 변경의 기관인 YMCA가 간행하는 『청년』지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언급이 심심치 않게 소개되고 있다. 거기서 김진헌이 「시대의 진보와 교회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개인주의가 사회주의로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는가 하면, 이대위는 「사회주의와 기독교」(1923. 5)라는 글에서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의 상동(相同)을 외치면서 "인류의 고통과 비애를 참극히 보고 측은심이 생겨 이 정형을 간절히 구하고자" 유물론과의 악수까지 불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사회주의에 도취한 나머지 예수마저도 민중의 해방자라고 외쳤다. 그러나 우선 그 글들이 한두 면에 달하는 극히 짧은 소감형식이 고, 그들의 역량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논자(論者) 중에는 그리스도교가 고유한 민중적 종교라고 천명하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사회주의자 제군들의 종교"라고 설득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해볼 수 있는 것은 감리교 신학교에서 발간한 『신학세계』이다. 1916년의 발간사에서 "본보(本報)는 순전한 종교적 잡지인 고로 정치에 관한 언론이나 사건은 절대로 싣지 않을 것이며……" 운운한 것으로 보아 정교분리의 원칙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교회와 나라는 서로 도와중이 될 터이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같은 목적이 있나니, 나라는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배양하기 위하여 좋은 땅을 준비하고, 이 배양으로 인하여 이익을 얻으며, 또 그리스도교는 각 방면으로 개발과 전진을 힘써 강함과 지식을 더 함이니라"(2권, 1917)라는 극히 모호한 정교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 선 『신학세계』는 31운동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저들은 재산과 노동, 부채와 고리대금업에 대한 계몽적인 글들을 써 왔는데, 그중 양주삼은 「기독인의 재산론」이라는 글에서 재산의 하느님 소유론과 위임론을 주장하면서 산명기 10장 14절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볼지어다. 하늘과 하늘 위에 또 하늘, 그리고 땅과 그 위에 있는 것 모두가 너희 야훼의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그의 결론은 "대개 점유권이라하는 것은 모든 물질의 가치를 가지고 쓰는 권리뿐이오, 소유권과는 같이 볼 수 없으니, 하느님 외에는 소유자가 결단코 없느니라"(1권 2호)라고 하고, "근일(近日)에 사회주의를 전파하여 빈부가 합동하여 살아야겠다고 하지만 사람이 하느님의 위탁으로 재산을 맡은 줄을 알며, 또 그의 뜻대로 시행하기 전에는 모든 이론이 일개 꿈으로 돌아갈지니라"라고 한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들도 사회주의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소유개념에서는 그들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이다. 까닭은 그가 교회재정문제를 다루면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창간사의 뜻과는 달리 사회문제에 접촉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노동문제, 저축문제, 빈 곤추방문제를 계몽적 입장에서 계속 취급하고 있으며, 특별히 토지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여 "토지를 가지고 농사짓는 농부가 세계에서 가장 자유독립한 사람이다. 경작한 토지는 경작한 사람이 마땅히 소유할 것이니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특권이다. 농부가 땅을 소유하게 하고 잘살게 함은 다만 농부에게 행복이 될 뿐 아니라 국내 평화와 사회진보와 국민의 기초를 공고히 하게 하므로 전국에까지 행복을 줄 것이다.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농민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면 그 국민을 잔학한 형편에 빠지게 하여 세계의 최악한 공산주의의 도화선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도 공산주의를 크게 의식한 글이며, 동시에 그 타당한 면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 면을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 주장이다. 또한 이런 글도 있다.

반기독교 제군, 제군은 자칭 사회주의라 하여 우리 기독교에서 자본주의사회를 옹호한다고 해서 반대의 표적으로 삼은 듯하다. 제군이 운위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가 한때에 어떤 나라에서 세력계급이나 자본계급에 이용되었으므로 사회주의의 반대를 받았던 것이 없었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어찌 그리스도교의 본의이랴. 제군은 같은 사회주의라 하여 그리스도교의 본의도 통찰하지 않고 반대와 파괴를 위주함은 너무도 불철저한 행동이다……(1925년 12월호).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대그리스도교 공격의 초점이 자본주의와 결탁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는 점과 그것은 본래의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는 항변이다.

1924년 '예수회연합공의회'라는 것이 창립되고 그 다음해에 이 공의회에 사회부라는 것이 설치되었다. 그 취지문에서 그리스도교의 원리로 사회문제를 해결코자 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932년 9월에 이 회의에서 '사회신조'라는 것을 통과시켰다. 그 내용을 보면 상당히 진보적이나,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적인 일체의 사상이나 방법을 배제한다는 선언이다.

이와 같이 세계적인 차원에서 민중문제를 다루어야 할 사명을 가졌고, 그것을 위해서는 사회주의자들과의 대결있는 대화를 지속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지도하는 한국 교회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민족적 독립을 위해서 큰 힘이 될 수 있으리라 믿고 교회의 문을 두드린 많은 사람들이 큰 실망을 안고 출교해 버렸다. 그중의 이름난 사람으로는 이동휘, 여운형 그리고 김규식 등이 있다. 이동휘는 마르크스주의의 ABC도 몰랐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레닌과 만났을 때 그의 질문에 거의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운형도 이동휘를 따라 고려공산당에 가맹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승동교회 전도사로 있었던 촉망받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김규식은 교회장로였다. 그러나 교회는 이들을 용납할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와의 결별 다음에 남은 것은 개인구원밖에 없었다. 그것이 순수한 그리스도교라는 것이다. 그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져오는 데 '순'(純)자는 1930년에 생긴 말로서, 정치적 안전지대를 찾는 이들에 의해서 창출된 것이다. 순수예술, 순수문학, 순수복음, 순복음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몰려온 민중의 민족적, 민중적 소원을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저들을 이기주의자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어디까지나 표면에 나타난 현상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민중의 저력을 믿는다. 1930년 이래로 다 죽은 것 갑은 화산맥에서, 197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활화산이 나타났듯이 민중의 소원을 스스로 이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