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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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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민중운동과 민중신학'이란 개념은 민중신학에 앞서 민중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민중신학의 발상지는 교회도, 대학도 또는 서재도 아니며 민중운동의 현장이란 말이다.

민중이란 어떤 기존개념으로 고정시킬 수 없다. 그것은 산 실체이다. 민중은 주체적으로 스스로를 규정해나간다. 민중은 집단개념이다. 그러므로 이데(Idee)와 연결되는 개체(Individium)와는 전혀 다르다. 민중은 희랍어에서 말하는 개체처럼 이데를 관조하고(theorien), 그것에 맞춰서 자신의 삶을 양육하는 모방적 존재가 아니다. 집단으로서의 민중은 계속 역사 안에서 사건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의 대상이다.

민중은 운동하는 실체이기에 정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 직접 참여함(praxis)으로써만 인식되는 실체이다. 그러므로 민중사건을 다루는 민중신학은 이론보다 실천을 우위에 둔다. 그러면 민중운동이 민중신학을 유도하게 된 구체적 경로를 살펴보기로 하자.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신학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그 관심사는 '인권'이라는 차원에 머물렀다. 그들은 '인권'이라고 하는 추상적 개념을 구사하면서, 실제로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하는 것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며, 또 그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21살의 청년 전태일군의 분신자살이 신학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전태일은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한노동자로서, 그날그날의 양식을 얻는데 급급했으므로 책을 읽을 시간이나 생각할 시간도 없는 처지에 있던 젊은이였다. 거기에 비해 신학하는 사람들은 정규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이른바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을 사회로부터 하나의 권리로 인정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몇 가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고, 유학을 통해 국제적 안목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전체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는 특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죽어가고 있는 사회를 인식하고 그 밑에 깔려 신음하는 민중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그렇지만 굶기를 밥먹듯하고, '배고파' 하는 신음소리와 재봉틀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뒤섞인 소리를 몸으로 듣고 있던 전태일은 소리없이, 보이지 않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 민중을 정확히 바라보고 각계에 호소했으나 이 사회는 카프카의 「성」처럼 그에게 차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육탄으로 이 굳은 성을 폭파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건이 되었다. 먼저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어났으며, 죽은 듯했던 노동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70년에는 165건에 불과했던 노사분규가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971년에는 그 열 배인 1,656건이나 발생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리스도교의 일각에서도 눈을 떠서 1971년 9월 도시빈민들의 발전을 위한 수도권 도시선교회를 발족시킴으로써 민중현실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참여 자들은 현장에서 뛰는 자들이었다. 민중신학은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이렇게 일어난 사건의 증인으로 그 뒤를 잇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테오리(Theorie)를 수립하고 전승하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이른바 학자가 아니라 노동 현장에 뛰어든 사람들이 그들의 프락시스를 통해 전태일사건을 재빨리, 그리고 그 사전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데 또는 로고스에서 이론'이라는 도식이 아니라, '사건에서 실천'이라는 도식이야말로 진실을 인식하는 척도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일부 신학자들이 책상에서 민중운동의 현장으로 그 자리를 옮기려 했고 민중이 일으킨 사건을 좇아가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책에 있는 이론 따위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기존체제로부터 용납되지 않아서 그들 가운데 일부는 대학에서 한 번 또는 두 번씩 추방되었으며, 범법자로 규정되어 투옥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민중의 현장에서 그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비교하면 정말 아무컷도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서, '갈릴래아 공동체'라는 것이 형성되었다. 언제나 관(官)의 감시하에서 다시 수감될 각오를 해야만 했던 긴장 가운데에 서서 신학자들과 수난당하는 민중은 '나'와 '너', 즉 주체와 객체가 아니라 '우리'라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민중신학이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