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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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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그런데 민중사건을 체험한 신학자의 눈에 성서가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그것은 성서 자체가 민중사건의 증언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성서 안에도 군주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산재해 있다. 신을 말하면서 실상은 강자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계급적 갈등을 은폐하고, 강자의 탄압이나 착취를 정당화하는 요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민중사건의 도도한 흐름에 부딪쳐서 일으키는 물거품에 불과하다.

석가는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삶에 일어나는 현상을 통틀어 고(苦)라 보고,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이같은 고에서 해탈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몰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므로 불교의 경전은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집중한다.

이에 반해서 성서는 출애굽이라는 사건에서 출발한다. 출애굽은, 호루스(Horus)라는 창조신이 화육한 파라오라는 군주세력이 지배하는 제국주의 군주국이었던 에집트에 살고 있던 노동계급인 합비루가 억압과 착취에 항거하는 투쟁 끝에 마침내 파라오의 권하를 탈출하여 광야 40년의 유랑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서 합비루의 자주공­ 동체를 형성하게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이 구약성서의 기조를 이루어 계속 반복되며 재현된다. 이것은 민중의 사건이다.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집단의 사건이다. 형이상학적 물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형이하학적인 절대적 요청에서 출발한다.

유교는 그 기점을 공자에 둔다고 할 수 있는데, 정치적인 모티프가 표면에 나움으로써 불교와 차원을 달리한다. 공자는 군웅할거한 당시의 봉건주들을 찾아다니면서 정치적 개혁을 종용한다. 그러나 그 뜻이 성취되지 않자 그는 제자훈련에 돌입한다. 그의 목표는 옳은 정치를 하며, 민의 모범이 될 이른바 군자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엘리트의 양성을 목표로 한다. 이 엘리트를 통해서 정치의 정도를 걷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 어디에도 지도자 양성이라거나 그런 이들을 통하여 기존의 정치체제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없다. 성서는 모세라는 큰 인물이 합비루라는 민중을 에집트의 탄압의 현장에서 탈출시키고, 그들과 운명을 같이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예수가 갈릴래아 민중과 더불어 함께 울고 웃었으며, 마침내 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가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예수를 따른 자들을 제자라고 말하나 그것은 교양이나 인생의 어떤 문제를 배우고 훈련받은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어디까지나 새 나라 건설을 위한 일꾼으로 부름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서 전체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철학도 지혜도 아니며, 바로 해방의 사건인 것이다.

민중신학자들이 해방사건을 중심으로 짚어본 성서의 맥은 다음과 같다. 앞서 언급한 출애굽이 그 첫번째로 서술된다. 자기 해방을 성취한 이들을 성서는 히브리인들이라고 하며, 이스라엘이 이들의 후예라는 점에서 기존에는 히브리가 민족의 이름인 것으로 이해되어왔으나, 실제로 그것은 한 계급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그 의미를 새롭게 해주었다.

합비루는 그 시대의 민중으로서 중동 일대에 만연하였다. 에집트에 있던 합비루들은 그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파라오제국에서 탈출하여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아 떠났다. 그리고 많은 고초 끝에 정착한 지점은 현재의 팔레스틴의 가나안이라는 땅이었다.

가나안 땅에는 많은 군소 군주들이 할거하여 그주변에 있는 주민들을 농노화하고 강제로 그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이 농노화된 사람들이 가나안에 있던 합비루들이다. 에집트를 탈출한 합비루들과 가나안 땅에 있던 합비루들의 만남은 제2의 엑소더스사건을 일으켰다. 그래서 저들은 자율적인 종족동맹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학자들은 이를 암픽티오니(Amphiktyonie)라고 부른다. 그런데 저들이 결속한 기치는 "야훼만"(Mono-Yahwism)이었다. 그것은 야훼만이 우리를 다스릴 유일한 주권이라는 고백이었다. 얼핏 보면 이것은 종교 공동체로 인식되기 쉽다. 물론 그런 면을 무시할 수 없다. 가나안 본 토의 합비루들은 엘(El)이라는 이름의 신을 섬겨왔다. 이에 반하여 군주를 위시한 지배층은 바알(Baal)이라는 신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왔다.

구약에는 바알신과 야훼신과의 대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종래에는 이것을 종교적 차원의 싸움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이야기는 '바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지배층과 "야훼만"을 내세우는 피지배계급인 합비루와의 투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엘' 신과 '야훼' 신을 섬기던 합비루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신앙의 대상을 내용상으로 일치시켰다. 그것은 곧 합비루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가난하고 눌린 자의 신이라는 말이다. 이들은 '야훼' 또는 '엘'이라는 신의 이름을 병존시켰다. 이러한 기치 아래 저들은 군주 없이 민중이 자치하는 국가형태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는 데,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종족동맹이다. 이 종족 공동체는 200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로써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는 철저한 평등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이 공동체에는 '사사' 또는 '판관'이라 번역되는 지도자가 있었다. 이들은 군주나 추장과는 전혀 다르다. 이들은 외세침입이나 재해와 같은 비상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민중에 의해 추대되어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지위가 세습적으로 물려지는 것은 물론 아니었고, 그들은 그들의 구체적인 역할이 끝나면 곧초야에 돌아가서 각자 자기 하던 일을 계속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도성과 같은 일정한 지역이나 궁성은 없었다.

이러한 민중에 의한 공동체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붕괴된다. 군주제도에 오염된 일부 사람들이 군주국을 만들기 위해 왕을 옹립하는 책략을 계속 벌였다. 저들과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다가 마침내 절충안으로 세워진 것이 사울왕이다. 사울은 왕이라고는 하지만 왕도도 없었고, 궁성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전제적인 권력을 행사하지도 않은 중간적인 위치에 있었다. 본격적인 군주국을 형성한 사람은 반디트(Bandit, 산적비적청부자객)의 장(長)으로서 이곳 저곳의 군주국을 찾아다니며 대리전쟁 같은 것을 해주고 이권을 취하던 다윗이라는 사람이었다.

다윗과 그 일군(一群)은 이스라엘의 숙적인 불레셋 군주국에 기식하면서 세력을 길러 이스라엘에 인접한 유다라는 지역을 빼앗아 왕으로 군림하고, 기회를 노리다가 왕인 사울이 죽고 전쟁에 패해 쇠약해진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점유함으로써 이스라엘 군주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민중에 의해 이룩된 이스라엘은 무너지고 대신 군주국 이스라엘아 등장하였다.

이때부터 민중은 다시 수난기에 들어선다. 이때 예언자라는 그룹이 등장한다. 저들은 무관의 왕자처럼 군주를 위시한 지배층을 공격, 비판하면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뜻을 대변하였다. 이렇듯 진정한 민중의 대변자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그중 일부 예언자들은 이 따위 체제의 나라는 차라리 멸망하는 것이 낫다고 확신했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불구원의 예언자들'(Unheilspropheten)이라고 한다. 진정한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과 민중의 소리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들의 주장은 맞아떨어져 이스라엘 군주국은 분단되고, 그 나라는 차례로 망하고 말았다.

외세가 침략하여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마다 지배층이 포로로 잡혀 갔다. 저들은 예외없이 대지주들이었다. 그들은 소유하고 있던 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본토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피지배계급뿐이었다. 이들은 빼앗길 것이 없었기에 거기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외세가 점유하고 남은 땅덩어리를 의세로부터 분배받게 되었다. 포로로 잡혀간 지주, 귀족층은 저들을 멸시하는 뜻으로 "땅의 사람들"(Ám hā´ āres)이라고 불렀다. 우리말로는 쌍놈과 같은 것으로 그 시대의 민중의 호칭이다.

민족적으로 지리멸렬하게 된 저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른바 상류층은 언제나 재빨리 말을 바꿔타고 외세에 붙어 기생하며 살아갔으나, 그렇게할 줄 모르는 민중은 절망 속에서 새로운 운동을 전개했다. 그것을 일명 '묵시운동'이라 한다. 사상적으로 보면 이것은 종말사상으로서, 모든 기존의 것이 철저하게 멸망하고 완전히 새로운 역사를 여는 개벽시대가 온다는 것인데, 운동의 차원에서 보면 지하운동인 셈이다.

이른바 묵시문학은 '유언비어의 문학'이다. 저들은 상징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기득권자들이 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계속 유포했다. 그러한 운동가들은 외세와 타협해서 이권을 노리는 반민족반민중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을 탈출하였다. 그중 일부는 철저하게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금욕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영위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생활을 포기하고 입산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적을 물리치고 혁명을 일으키려는 무리도 있었다. 전자는 에쎄네파라하고, 후자는 젤롯당이라 한다. 저들은 모두 묵시문학파이다. 예수운동은 바로 이러한 와중에서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