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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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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앞에서 민족의 개조를 부르짖던 소리가 비판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남의 규정에 자기를 줄여서 맞춰가려고 하는 주장이라는 관점에서였다. 민족의 개조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 개조를 한다면 어떤 본보기가 있을 터인데 어떤 본보기를 끌어들일 것이냐? 민을 살리는 길은 민의 개조가 아니라 그 자체가 지닌 가능성을 가로막는 요소를 없애버리고 스스로 발전하는 길뿐이다.

우리의 민에 대하여 낙관하는 사람도 있고 비관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어느 것도 성급한 판단이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우리의 민은 아직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가능성을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는 여건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미지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의 개조가 아니라 민이 스스로 자기를 찾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만이 산 민족이 되게 하는 오직 하나의 처방이다.

옳은 민이 되고 산 백성으로 꼿꼿이 서는 첫째 조건은 자신의 존엄성을 확실하게 자각하는 일이다. 이 존엄성은 곧 '인내천'이며, 사람의 권리는 타고났다는 의식이다. 이와 같은 자의식이 뚜렷한 백성 이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나 제도의 도구나 이용물이 되지 않을 것이며, 또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백성'이기에 앞서서 '사람'이라고 하는 분명한 자랑이 영글었을 때에야 비로소 산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옳은 백성은 자기가 한 민족 또는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임을 알 뿐만 아니라 연대적인 책임의식도 뚜렷하다.

민족이나 국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숙명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숙명적인 체념 속에서 책임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결단에 의해서 필요할 때에 자신을 내놓고 이 공동체의 운명을 위하여 스스로 참여한다.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동도 자주적인 결단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는 용감할 수 있으며, 자주적인 선택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일의 귀함과 천합도 없다. 이러한 민에게는 국가가 어떤 혜택을 주느냐고 묻지 말고 네가 국가를 위하여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으라는 따위의 교훈은 쓸데없다. 그가 결단하는 순간에 국가와 자신의 길은 한 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 백성에게는 맹목적인 복종이나 두려움에서 오는 굴종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결단과 함께 이미 그것은 남의 일이나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되기 때문에 방관적으로 체념하는 것 같은 맹종이나 굴종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지도자에게 복종할 뜻을 가지고 있어도 그 길이 어떤 각도로 보든지 옳지 않고 전체 공동체의 운명을 그르친다고 확신할 때에는 죽음을 무릅쓰면서라도 항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목숨을 걸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할 줄 모르는 백성을 가진 민족은 마침내는 망하고 마는 법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이나 일본의 그르다고 부르짖는 민중의 소리가 세계에 전해졌더라면 세계인은 지배자들과 백성을 구별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도 그들을 아주 못난 백성으로는 차마 단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은 아주 적은 수나마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항거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코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때에 스페인 사람들은 못난 백성으로 낙인이 찍 혔었다. 망명한 프랑코 비판자들의 소리가 이 낙인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그 소리는 너무나 약했다.

산 백성은 제 일은 제 스스로가한다. 개인으로도 정부나 다른 누구에게 기대지 않으며 민족으로도 다른 나라의 힘에 기대지 않고 제 힘으로 제 운명을 개척한다. 이와 같은 자주적인 의지는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기적을 낳는다. 이와 같은 의지의 결단은 결코 공론공담으로 시간을 낭비하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추상적이지만 바람직한 민의 상을 이렇게 놓고 한국 민을 생각해 보자. 우리 '백성'은 잘났나 못났나?

역사를 보던 지금까지의 눈으로 보면 비관적이다. 겉으로 드러난 얼굴만으로 엮은 한국의 역사에 나타난 민의 얼굴은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나 바관하고 주저앉지는 말아야 한다. 이미 말했지만, 이날까지 우리의 민의 가능성이 양성화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요즈음에 뜻있는 사람들은 이 백성의 제 모습을 찾아내려고 응 달에 가려 있는 민담, 설화, 민속 소리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이른바 '정사'에 나타난 우리 민의 모습은 제 모습이 아니라는 반증이 되며, 비록 겉으로는 죽은 듯했지만 숨어서는 살아 있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하는 까닭이다.

오늘까지 탐색해온 결과만으로도 정사에 나타난 얼굴과는 다른 이 백성의 얼굴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그냥 죽어 있지는 않았었다. 분노로 꿈틀거리는 그들의 맥박은 쉼 없이 뛰고 있었다. 그것은 유린된, 천부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절규였다. '백성'이기에 앞서 '사람'이라는 지각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그저항이 양성화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저항의 방법이 달랐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면 오늘에도 그와 같이 맥박이 뛰고 피가 흐르고 있는가?

이 물음에는 얼른 대답할 수 없다. 표면에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혀 부정할 수만은 없다. 지난날에도 죽은 듯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좀더 미루어두어야 한다. 그러나 뚜렷한 과제 앞에서 이 민족의 제 모습은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자주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만할 조건인 통일을 제힘으로 성취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그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이러한 심판의 과제를 앞두고 바람직한 백성의 얼굴로 떠오르는 것은 독일의 민족성이다. 그 민족도 분단되어 있기 때문에 오는 연상 작용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그들에게서 배울 점이 한두 가지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독일의 민족성을 농부의 소박함과 근면성과 군인의 규율적인 기질의 복합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우직성이라고 느꼈는데, 우직성은 성실성과 통한다. 그들은 소처럼 꾸준히 일한다. '눈치껏'이라는 이른바 요령을 모르는 민족인 것 같다. 그들의 근면성을 프랑스 민과 견주어보면 프랑스 민은 먹기 위해서 일을 하고, 독일민은 일을 하기 위해서 먹는다는 말을 들을 만큼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민족같이 보인다. 모든 작업에서 독일 사람들의 기본 자세는 그들의 말로 'Gründlichkeit'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것 이거나 그때 그때 겉치레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부터 근원적으로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가림으로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 농부들이 일하는 자세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영리한 자에게는 참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마치 시간관념이나 능률 따위를 계산에 넣지 않는 듯이 기초작업에 많은 시간과 힘을 기울인다. 이런 자세가 독일 사람들은 미련하다는 말을 듣게 하는데, 실제로도 그들의 말초신경은 무딘 듯하지만 그들의 중추신경만은 아무 탈이 없다고 판단되므로 이 말은 독일의 민족성을 부풀려 말했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어쨌든 그들은 우리의 민족성에 요청되는 바를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의 우리 민족은 중추신경보다는 말초신경이 더 발달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앞길은 험난하고 풀어야 할 여러 가지의 뒤엉칸 '상황의 매듭'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말초신경은 되도록 무디게 하고 중추신경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우리 백성에 대한 나의 소박한 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