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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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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을 놓는가

마르코복음 6장 14절에서부터 16절까지를 읽어봅시다.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헤로데왕이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세례자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래서 그가 이런 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하고 더러는 '그는 엘리야다' 하고 말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과 같은 한 예언자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극히 짧은 단락입니다. 그런데 이 단락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는 주제가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을 불법으로 죽인 안티파스의 불안과 공포가 그 주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 속에도 그런 식의 주제들을 무수히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매맞은 사람이 때린 사람보다 다리를 뻗고 잔다는 말이 있지요. 어떤 일에 비록 승리를 했다고 해도 상대방을 괴롭히고 불의한 방법을 사용한 이 승리자는 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자책하고 고민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해를 입힌 그 상대 방이나 자기가 한 일이 꿈에도 나타나고 허깨비로도 나타난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단락에는 그런 주제에서 밀려나 있지만 그 시대에는 보편화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환생한다는 신념입니다.

예수가 활동을 시작하니까 사람들은 단순하게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온 이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생각도 하기 전에, 안티파스가 자신이 저지른 불의를 시정할 생각은 않고 자기를 공격한다고 처형한 세례자 요한이 환생한 것이라고 예수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예수가 안티파스에게 복수할 것을 바랐는지 모르지요. 어떤 사람들은 한 이방 여인에게 놀아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대상인 야훼 대신 바알 종교를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열왕상 16, 29~34), '나봇'이라는 한 농부에 대한 그의 잔인성에서 보는 것처럼 사욕을 위해서는 국민, 아니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학살하는 아합왕(열왕 상 21, 1~26)에게 대항해 싸우다 지쳐버린(갑자기 사라져버린)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는 신념도 상당히 퍼졌을 것 같습니다. 이 신념은 살인자 안티파스까지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도 환생을 믿은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필립보 가이사 리아 도상에서 있은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 속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마르 8, 27~30/ 공관).

루가복음 12장 8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하면 인자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하겠다.

이 구절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예수 자신의 말이라는 것을 비판적인 학자들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예수의 입을 통해 '인자'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은 일인칭과 삼인칭으로 나뉠니다. 일인칭으로 된 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 흔히 보듯이(가령 에제키엘) 단순한 의미의 '나'를 대신한 말로 사용되어 온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특수촌재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예수 자신이 자기에게 이 명칭을 쓰지만 제자들은 예수물 지칭하여 이 명칭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인칭의 경우에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다니엘서 7장에 나타나는 바로 메시아적 세계심판주 같은 특수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두 경우를 엄격히 구별해왔습니다. 그런데 루가복음 12장 8절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지금의 나와 장차 올 인자를 구분하면서도 그 연대성을 분명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때 당시의 일반화된 신념을 바랑으로 이 뜻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가 환생한 엘리야라든지 세례자 요한이라는 신념과 '인자'를 연계시켜보면, 바로 '나는 장차 인자로 내림할 것이다' 하는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이런 인자를 말하는 예수 자신은 한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때리면 맞고 찌르면 죽는 그런 한계적 존재 말입니다.

예수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면서 거듭 자신은 죽었다가 살아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특히 이것은 더군다나 수난의 도시, 이제 십자가에 못박힐 예루살렘 도상에서 한 말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는 무엇인가 목적이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저을 겨루어보기도 전에 죽을 것을 예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만일 죽는 것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예루살렘행만큼 어리석은 행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살아날 능력이 있다면 죽을 필요가 있느냐고, 그것이 베드로의 입으로 행동으로 대변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어야 산다는 자세가 단호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죽음의 길을 가로막는 제자에 대해서도 "사탄"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점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 예언처럼 정말 살아난다는 것이 확실했는가? 그러나 이른바 수난사(마르 14, 1~15, 16)에는 그가 다시 살리라는 어떤 가냥픈 기대도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처절한 기도, 불법한 재판과정에서의 철저한 침묵, 십자가에 처형되는 현장, 그 현장에서는 유신론자들이 "이제라도 그 십자가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우리는 너를 믿겠노라"고 기대와 조롱이 섞인 요구를 해왔으나, 예수는 한낱 나무에 달린 채 못과 창에 찔려 피를 흘 리는 일반적인 인간 이상의 모습밖에는 보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절규로 끝납니다. 아무리 봐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신념을 가진 자의 수난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의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비동한 죽음으로 끝 나는 스승을 바라보는 제자들일지라도 만일에 그가 사흘 만에 살아 난다는 사실을 신념화했다면 끝까지 당당했을 것이고, 그같은 바열 한 모습을 보이거나 도망해버릴 까닭이 없습니다. 심지어 끝까지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고 최후의 증인으로 남은 여인들마저도 예수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추호도 기대하지 않은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죽은 다음날, 즉 안식일 새벽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갈 때에 그의 부활 따위를 기대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저들은 가는 길에 단지 죽은 시체를 가로막은 돌을 치울 걱정과 그들의 사랑의 표시로 그 시체에 향유를 발라줄 생각만했던 것입니다. 수난사 전체에는 죽음이 끝이라는 것 이상 아무것도 다른 요소가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서의 서술법은 특이합니다. 예수가 다시 살리라는 기대 따위는가지지 않은 여인들이 무덤 안에서 예수의 시산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즉 빈 무덤만을 본 것뿐입니다. 이것을 사실로 전제하고 생각할 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특히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나? 아니면 가사 상태에 있던 예수가 기력을 회복하여 어디로 피신했나? 아니면 죽었던 그가 정말 살아났나? 예수의 수난예고를 전제로 하면, 예수의 예언을 잊어버렸다거나 믿지 않았던 것을 참회하는 그 여인들의 한두 마디의 말쯤은 있음직한데, 그러한 흔적도 없습니다. 단지 절망과 허탈상태에 빠져 있는 그 여인들 앞에 한 청년(천사가 아닙니다)이 "놀라지 마라.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자렛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그대들은 지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라고 전하라"(마르 16, 6~7)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한 메신저 역할을 한 셈입니다.

이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죽었던 예수가 정말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살아남이 결코 정신적이거나 영혼 따위 등 어느 부분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전체(Whole Being)로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런데 다시 살아난 예수는 죽은 현장인 그곳에서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하던 갈릴래아에서만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주목할 것은 이 청년 이 그 여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은 예수는 당연히 무덤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루가에는 이 말이 책망조로 강화됩니다.

왜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루가 24, 5)

그런데 그 마르코복음 기자는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지 죽었다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는 루가의 표현도 같습니다. 한 가지 더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말로 마르코복음 16장 6절의 "다시 살아났다"고 번역되었는데, 희랍어 원문 자체에는 "다시"라는 말도 없고 "살아났다"는 말로 번역된 '에게이로'(ἐγείρω)는 보통 '일어난다'는 뜻으로, '자다가 일어난다', '앉았다가 일어난다', '병들었다가 건강해진다', 심지어 '전진한다'는 의미로 쓰인 말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무덤을 탈출한 예수(죽음에서 일어난 예수)는 어디에서 어떻게 실재한다고 믿었는가?

그러나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이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붓을 놓습니다. 그는 갈릴래아에서 부활한 예수가 현시하는 따위의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물론 그후에 기록된 마태오, 루가, 요한복음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마르코는 그 복음서를 쓸 때에 갈릴래아나 혹은 예루살렘에서 부활한 예수가 현시했다는 전언들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그런 이야기는 완전히 침묵해버렸을까? 이 침묵을 통해서 볼 때, 마르코와 그 집단은 예수의 다시 사십을 후의 다른 세 복음서에 수록되었던 것같이 이해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마르코가 예수의 정신적인 계승 따위를 말하려는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르코가 몸을 뺀 어떤 부활을 생각지 않은 것으로 입증됩니다. 말하자면 전체로서의 일어남(살아남)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다시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처음 동지를 규합했던 그 자리에서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자고 한 사실입니다. 저들은 갈릴래아에서 어쩌면 다른 복음서들에서와 같이 부활한 예수의 환상 따위를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가 봅니다. 요는 저들은 예수의 부활을 자기들의 일어남을 뺀 어떤 다른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부활 경험을 한 다음에 저들은 변신하였습니다. 저들은 어제의 베드로도 요한도 안드레아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를 배신하고 도망쳐버린 그들은 물론 더욱 아니었습니다. 저 둘은 불사조와도 같은 신념을 갖고 과감히 일어났습니다. 마치 제2, 제3의 예수인 듯, 저들은 우리 안에 예수가 환생했다는 신념에서 도로 일어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