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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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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사건

우리는 이상에서 그것을 부활이라거나, 다시 산다거나 또는 환생이라고 부르거나 간에 이런 신념을 관철시키는 데는 다음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역사는 반드시 정의로운 목적을 향해 간다는 목적론적 사관을 가진 민족이나 집단에게 가능하고, 둘째는 역사발전에 인간이 주역으로 참여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가 가야 할 방향대로 가지 않고 불의한 자들의 횡포의 장으로 변함으로 그 목적이 불투명해집니다. 그와 더불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의 그 희망은 한(恨)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비록 자기의 힘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목적의식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소명처럼 받는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나 그 영원이 계승되어 완성되는 그날을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령 부모가 자기 생에서 이루려는 간절한 소원이 좌절되었을 때, 그 자식이 대를 이어 그 일을 완성하기를 요구하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후계자를 양성함으로 그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지가 가장 진하게 드러나는 것이 '환생'이라는 신념입니다. 그것은 혈연적인 전승이나 또는 정신저인 계승과 같은 어느 부분을 인계해주는 것 같은 양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의 목적 또는 한을 풀지 못한 그 역사에 어떤 형태로든 변신하여 다시 나서 그 일을 계속하겠다는 신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부활 사상도 한의 역사를 무시하고는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한은 물론 힘없는 자의 한입니다. 어떤 가진 것으로 문제를 척결할 수 없는 자의 집요한 투쟁의지의 반영입니다.

민주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한국 민족만큼이나 자기 정부에 의해서 박해를 받고, 억울한 죽음을 그토록 많이 당한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특히 419 이래로 죽음을 무릅쓰고 전선에서 싸우다가 희생 되어가거나 아니면 불의한 구조적인 악에 대항할 어떤 것도 갖지 못했기에 자기 몸을 불살라 민족제단의 제물로 삼는 일이 속출한 민족사를 나는 다른 데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노동자들도 그 뒤를 이었습니다. 저들이 오죽 한에 맺혀 있으면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그어댔을까! 그러나 그런 자기 희생을 단순히 자학적인 행위라고 규정해버리면 그것은 저들의 뜻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아니, 저들이야말로 반드시 옳은 민족사회가 이루어지고 만다는 신념을 그렇게 나타낸 것입니다.

419 이후, 1970년 전태일의 분산자살 이후 수많은 수난사 가운데 광주학살사건이나 또는 분산자살하여 민중봉기를 유발한 때가 돌아오면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그날을 기억하여 어떤 형식으로나 행사를 치릅니다. 특히 지난 5월은 광주학살사건 10주년으로서 다른 때보다 특별한 의미를 두고 긴장 속에서 행사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의 행사에서 무엇을 기대하거나 얻습니까? 크게 나눈다면 '진혼제' 같은 제사형식을 취하거나,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로 되살려 사람들의 희미해진 기억을 되찾게 하고 죽은 자들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노력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환생'이나 '부활'이라는 신념은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전태일이나 광주사건의 박관현이나 송광영이나 김세진 등의 죽음을 단순히 추모하거나 정신적으로 그들의 절규를 이어받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전태일, 박관현, 김세진, 송광영이는 반드시 살아나서 그들이 절규하던 내용을 성취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존재로 변형하여 환생함으로 그 싸움을,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승할 것이라는 신념이 우리의 것이 된다면, 우리의 역사의 모습은 급속히 달라질 것입니다. 칼을 가진 자가 법까지 무시 하면서 자기의 적대자를 죽여버리면 일은 끝난다고 안심해도 되는 사회라면 누가 그 횡포를 막을 수 있을까?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행태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자기가 불의한 동기로 처형한 세례자 요한이 환생했다고 하는 민중의 염원과 신념 앞에 떨 수밖에 없었던 그런 풍토가 우리에게 있다면, 가령 광주의 대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는 오늘까지 그 가해자들이 계속 거짓말로 이 민족을 기만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나 전설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생 동안 무술을 닦고 그 원수를 찾아 전국을 헤매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했다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스라엘 민중이 믿었던 것과 같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거나 처형 된 이가 다시 다른 모습으로 환생해서라도 그 일을 이루리라는 그런 집요한 기대와 믿음이 있다면, 투쟁에서 체념이란 있을 수 없으며 소수라는 고립의식에 빠져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횡포의 역사는 그만큼 빨리 단축될 것입니다.

 

■ 『살림』 1990년 7월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