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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민중적 민족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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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중적 민족

▶ 현상에 대한 진단은 어느 만큼 나왔으니까, 이제 조금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선생님 말씀 가운데 '민중적 민족'이라는 표현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 민족을 바로 그런 개념으로 포착하게 되면, 영어의 네이션(nation)이나 독일어의 폴크(Volk)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겠지요. 그런데 우리 민족의 민족의식은 어떤 계기에서 형성되었을까요?

역사적으로는 잘 규명하지 못하겠지만,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우리 민족이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적대의식을 별로 갖지 않았단 말이지요.중국은 문화적으로 침탈해 들어왔지,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지배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우리 민족의 민족 의식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고조되었어요. 우리 민족은 일본을 문화 적으로 깔보았는데, 그런 일본이 군사적으로 침범해 들어오니까 이에 대한 저항감이 컸던 것이지요.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으로서 오랜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이 클 수밖에 없었는데, 지배세력이 민족개념을 유일한 고리로 삼아 통합을 이루고자했어도, 대외적인 측면에서 우리 민족은 계속 눌려 살 수밖에 없었단 말이지요. 우리 민족이 민족을 내세울 때에도 제국주의적인 의미의 민족주의를 표방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우리 민족은 의세에 억눌린 상태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의미의 민족주의를 내세웠을 뿐이지요. 그야말로 '민중적 민족주의'라고나 할까요?

▶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민중적 민족' 개념은 부르주아적 민족 개념이나 마르크스주의적 민족개념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글쎄,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우리의 민족개념은 부르주아적 민족개념은 아니지요. 유럽에서는 민족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봉건사회가 자리잡고 있었지요. 바로 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족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민족개념보다는 계급개념이 앞서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유럽의 민족국가에서는 그야말로 민족국가보다는 부르주아계급이 중심에 선 민족국가가 앞섰고, 그것이 제국주의시대에 들어와서는 침략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엄밀한 의미의 봉건사회가 없었어요. 우리는 타 민족의 박해와 침략 속에서 민족주의를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우리 민족에게 계급의식이 생긴 것은 자본주의체제가 이식되면서부터이 지, 지금 내 기억으로는 타민족과의 관계에서 계급의식이 싹렀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마르크스주의는 서구의 역사경험으로부터 나을 수 있는 것 아니에요? 1920년대에는 한국에서도 마르크스주의가 시골에까지 깊이 침투했었는데, 지주에 대한 저항은 계속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반제투쟁이었단 말이에요. 계급의식이라는 것은 별 게 아니었어요. 해방 후 이북에서 계급의식을 고조시키려고 했어도 뭐가 있었어야죠. 소지주들을 내쫓고, 별것도 없는 부르주아와 계급에 대한 투쟁을 자꾸 강조했는데, 그 점에서는 성공을 못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어요.

지금은 문제가 다릅니다만,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외세에 눌려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내부에서의 계급의식보다는 외세와의 관계에서 민족의식이 더 강했어요. 물론 계급적인 의미에서 민중은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을 당했고, 이 지배층은 다시 외세와 결탁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요.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민중이 일어났다가도 쓰러진 것은 언제나 지배세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원병에 의해서였단 말이지요. 그리고 이 괴뢰적인 정부가 유지된 것도 외세의 힘 때문이었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민족의식에는, 우리 민족 전체가 외세에 의해 깡그리 망한 민족이다, 외세에 의해 수난당하는 민족이다 하는 감정이 일차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어요. 이 감정은 지배 세력에 의해 역이용당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지배세력과 외세에 의해 이중적으로 억눌리고 수난당하는 민중이 있었어요. 그들에게는 외세의 침탈을 받는 서러움과 한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지요.

▶ 그러니까 우리 역사에서는 민족감정이나 민족의식, 민족주의를 가진 사람들이 지배층이 아니고, 외세의 침탈과 이와 결탁한 지배층에 의해 착취를 당하며 서러움과 한을 안고 살아가는 민중이라는 것이지요? 선생님께서는 평소 '민중적 민족'을 말씀하시면서 문화적 차원을 굉장히 중시하지 않으셨습니까? 방금 서러움과 한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셨는데, 그것을 조금 더 보충해주시면 '민중적 민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렇지요. 역사가들은 어떻게 정리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체념의 역사였어요. 남을 침범하지 않는 평화 민족이라는 것은 미화하는 말이고, 실제 체념에 빠져 힘이 없었어요. 역대의 왕조나 위정자들은 이 체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민을 지배 하기도 했죠. 지배층은, 앞에서 말한 바 있듯이, 민족주의를 내세울 필요가 없었어요. 언제나 외세를 이용했기 때문이지요. 지배층은 또한 '충'(忠)과 같은 지배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어 왕권에 저항할 수 없는 것처럼 민중을 세뇌하기도 했지요. 특히 이조 500년이 그랬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진실한 민족주의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중은 노동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고 민족의 살림살이를 꾸리는 살림의 주체가 아닙니까? 이 살림의 주체는, 외세의 침략을 받았을 때 민족이 살아야 우리도 산다는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텐데, 거기서 민족의식이 발전하지 않았겠어요? 민중이 강인한 힘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간도에서의 경험인데, 한국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이야기하게 되면, 거의 예외없이 울어요. 가슴에 한이 차 있는 증거지요. 그렇지만 그들은 개, 돼지처럼 산다고 자학하면서도, 땅을 빼앗기면 화전을 일구어서라도 살아야겠고, 정 살 곳이 없으면 만주에 가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고 나선 사람들이거든요. 그들은 수난 속에서도 강인하게 살아간 사람들이지요. 물론 그 일차적인 동기는 굶지 않고 살아남아야겠다는 것이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