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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by 운영자 posted Dec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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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 의식

▶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볼까요. 민족적인 것에 대해 예수는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요?

'민족' 개념을 강조한 신학자는 고가르텐(F. Gogarten) 이지요. 그는 이 개념을 히틀러시대에 사용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민족'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트노스'(ἔθνος)거든요. 이 낱말은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였지요. 그것이야 어떻든 예수가 보고 있는 궁극적인 세계에서는 민족주의니 뭐니 하는 것이 다 해소되지요. 그러나 예수는 선 자리에 대한 책임의식이 굉장히 강했어요. 저는 예수야말로 특수성을 통해 보편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은 분이라고 봐요. 이스라엘 민족은 특수한 민중적 민족이 아닙니까? 예수는 일차적으로 민중적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태어났다는 것과 그 민족의 운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어요. 예수는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마태 10, 5~6)고 말한 적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이 먼저라는 것을 강력하게 말한 것이지요. "잃어버린"이라는 말도 민중적 민족을 표현하는 상당히 중요한 어구라고 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찾아라, 그래서 하늘나라가 임박했다고 전하라고 한 예수의 말에서 민족주의를 읽자는 것이 아니고,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가장 수난당하는 사람들,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성실한 책임의식을 읽자는 것이지요.

저는 눈앞에 있는 것을 떠나서 세계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봐요. 이 점에서는 바울로도 마찬가지예요. 바울로는 이방인 선교에 전념했으면서도,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로마 9, 3)라고 말합니다. 바울로의 말은 이른바 구속사적 의미에서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말에는 자신이 태어난 민족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깊이 뿌리박혀 있죠. 이것은 예언자들에게도 뿌리 깊은 사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가 민족을 도의시하고 세계주의로 넘어갔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그러나 장차 올 그때는 '민족'이라는 것도 달리 해석되겠지요. 마태오복음 8장 11절에는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나라에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고"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은 가장 오래된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가 직접 한 말로 볼 수 있어요. 이 말은 예수의 관심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음을 말해주지요. 복음서들도 예수의 생애를 보도할 때에는 이스라엘에 국한되지만, 부활한 이후에는 온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놓고 있어요. 마태오복음 28장 20절에도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하는 말이 나오지요.

아무튼 예수는 그의 현장인 이스라엘에 대한 관심이 강했는데, 그것이 민족주의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관심은 "지금 먼저 여기"라는 현장성이 강했다고 볼 수 있어요. 철저한 수난을 당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장, 그리고 수난을 당했기 때문에 민중성이 가장 강한 사람들의 염원에 호응해서 먼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고 했다고 봐요. 그것은 민중적 민족에 대한 관심의 발로였는데, 이 점이 강조되어야 할 거예요.

한 가지, 요한복음 4장은 이러한 해석에 약간의 걸림돌이 되기는 해요. 요한복음은 가장 보편적인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데도,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는 "구원이 유다인에게서 온다"고 하거든요. 문제는 문제인데, 고난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고난받는 이스라엘 민중을 통해서 세계구원이 온다고 예수가 말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많다고 봐요.

▶ 선생님께서는 선 자리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조하셨는데, 이러한 책임의식을 잘 보여주는 민중적 표현이 있을까요?

지난번 어느 곳에선가 '환생'을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어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에 두려워했지요. 예수를 보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죠. 저는 이 모티프를 중시해서 한 맺힌 사람은 다시 둔갑을 해서라도 한이 풀릴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환생'이라는 말이 적절한 언어일지는 모르지만,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한번 이런 생각을 해보라"고 말하곤 하죠. 엘리야가 다 풀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서 내가 엘리야로 환생했다고 말이에요. 그것은 정말 무서운 민중성이라고 봐요. 저는 생명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생각은 수난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일반상식과 같은 것이었어요. 마카베오시대 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은 그들이 묻힌 바로 그곳에서 다시 살아나 그 한을 풀 것이라는 생각이 유다교 묵시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 프로 자리잡기도 했었지요. 루가복음 12장 9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는 말이 나오는데, 앞에 나오는 "나"와 뒤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은 서로 다른 실체예요. 나를 죽이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모습으로 다시 둔갑을 해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뜻이 그 말에는 담겨 있어요. 생명은 그런 겁니다.

전태일이 죽었지만, 전태일은 무엇으로 태어나든 다시 태어나 활동하고 있어요. 흔히 전태일의 정신이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저는 정신적 계승이라는 말은 피하고 싶어요. 전태일은 죽지 않고 되살아 났어요. 생명은 그런 겁니다. 안 죽는 것이 생명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도 죽지 않았어요. 그를 죽였는데, 그는 죽지 않았어요. 앞에서 저는 예수를 생명의 근원이라고 했고 민중의 전형적인 예로 본다고 했는데, 마르코복음의 서술에서 죽은 다음의 예수, 부활한예수의 모습은 왜 그려지지 않았을까? 참 바른 해석을 했다고 보았어요. 마르코는 마태오나 루가처럼 떠돌아다니는 예수를 보여주려는 동기를 상당히 약화시켰는데, 그것은 예수가 환생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가 그냥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마르코는 그 말을 아예하지 않고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는 것으로 그치고 말거든요. 그러면 그때 일어난 사건의 정체는 무엇이냐? 그것은 죽었던 민중이 일어났다, 환생했다, 예수는 민중으로, 집단적 민중으로 환생했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예수는 오늘 우리 한국에서도 환생하고 있어요. 저는 이 모티프를 서 있는 현장에 대한 책임의식과 연결시키고 싶어요. 예수가 갈릴래아의 민중으로 환생했듯이, 예수는 오늘 한국에서도 환생하고 있어요.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그 누구인가의 환생으로 그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어야 해요. 죽어도 이루어야 해요. 한국 민중이 품고 죽은 한을 풀기 위해서 민중은 오늘 나와 너, 우리의 모습으로 환생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이 선 자리에 대한 책임의식의 뿌리라고 봐요.

▶ 선생님께서 선 자리에 대한 책임의식과 환생의 모티프를 연결시킨 것을 흥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아까 선생님께서 민중이 민중성을 실현하고 민중의 생명력을 실현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는 것을 시사해주셨는데, 민족문제도 그런 안목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요즈음 민족자주화와 민족통일, 사회민주화 등에 관한 논의와 실천이 활발한데, 선생님께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