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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뜻

by 운영자 posted Oct 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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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뜻
사도 17, 31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통하여 의로써 세계를 심판하실 날을 정하시고 또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근거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인 헬라, 아덴에서 행한 바울로의 설교의 끝말이다. 이 설교는 하느님이 주관하는 세계사의 형성과정을 말한다. 모든 것을 창조하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역사(시대)를 이끌고 지역을 구분해 주고 지금도 역사 안의 인간과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에 이 설교는 헬라인은 종교심이 많은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참 궁극적인 것, 역사의 핵심을 추구하고 있는 증거이다.

저들은 스스로를 신의 자손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저들은 치명적인 잘못에 빠진 것이다. 그것은 저들이 이러한 추구심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신전으로 표상하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예술작품과 신을 혼돈해버린 것이다. 이 설교는 이러한 종교심은 모두 '무지한 시대'의 유산이라고 단정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낡은(무지) 시대에서 더이상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 길에서 돌아 앞으로 회개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본문은 이러한 설교의 결론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결론은 바로 이 설교의 중심이다.

하느님은 이 세계사를 심판할 날을 정했다. 그것은 의와 불의, 사랑과 증오, 거짓과 참이 뒤섞인 이 세계의 끝이며 그 양면을 갈라 놓는 날이다. 이 날은 '한 사람을 통하여 도래한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예수를 뜻한다'(18절). 이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났다. 이 사실은 바로 그가 이 역사의 끝임과 동시에 핵심이라는 증거이다.

이 설교는 예수의 부활이 바로 역사의 중심임을 말한다. 예수의 부활은 우주적인 사건이며 역사는 바로 이 사건을 기점으로 도는 것이다. 즉 예수와 그 죽음에서의 부활의 사건은 이 역사의 뜻이란 말이다. 세계사는 바로 예수의 부활의 전역사이며 부활한 그리스도는 바로 이 역사의 종착점인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 부활사건에서 출발됐다. 예수가 죽고 산 것처럼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그들 나름의 기대와 욕구를 절망 속에 장사지내 버리므로 다 흩어졌다가 그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 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설교(케리그마)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초점으로 반복되었다(행 2, 24.32; 3, 15; 4, 10; 5, 10.40; 13, 20; 1, 33-14; 17, 31).

부활신앙은 인간의 종교심의 발로가 아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인간은 이 죽음을 피하려고 했으며 그 소원은 영혼불멸 따위의 종교 심리로 이끌게 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이러한 종교적 신념은 '무지의 시대'의 유무로 단정한다. 부활 사건은 개개인의 영혼을 이 세상에서 탈출시킨 사건이거나 이 낡은 삶을 무한하게 연장하게 하는 사건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바로 이 세계. 이 인간 역사의 구원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 역사가 발전되어 좋은 세계가 됨으로써 인간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역사의 종결임과 동시에 전혀 새로 주어지는 새 세계! 요한묵시록의 표현대로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단장한 신부처럼 하늘에서 오는 새 현실이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구원의 종국을 앞당겨 보여 주는 사건, 아니 그 일이 발동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 뜻에서 그의 부활이 믿음의 근거라고 한다.

이러한 설교는 희랍 사람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들은 이 말씀을 비웃었다. 그러나 삶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 한 저들은 그 이야기를 다시 듣기를 원했다(32절). 이러한 선포가 헬라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저들의 세계관에서 보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이 세계나 인간은 이미 완결된 예술품으로 보았다. 있을 것은 다 주어졌다. 사람이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다듬고 조화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예술이요, 과학이요, 나가서는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새 것, 새 사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부활신앙은 이 세계 자체를 하나의 무정란으로 봤다. 따라서 그 자체는 아무리 발전해도 생명을 낳을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이 역사의 희망은 그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 즉 밖으로부터 새 것이 주어질 때만 비로소 살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이란 바로 밖으로부터 역사 속에 들어온 삶의 사건이다. 말하자면 이 역사가 생명을 수태한 셈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다.

따라서 이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참 새로운 삶에 참여함으로 새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신앙이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피조물이 됐다 함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