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_B_5s

두 가지 물음

by 운영자 posted Oct 02,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두 가지 물음

편지로, 구두로 받은 질문 중에 성서에 대한 물음과 신학에 대한 물음이 제일 많았다. 내가 성서를 최종 기점으로 한다면서 성서를 그처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데 어떻게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가라는 질문과, 많은 사람이 당신은 불트만(Bultmann) 밖에 모르며 거기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떤가 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의 대답은 몇 마디로 할 수 없으며, 이 그 연륜을 쌓아감에 따라서 그 대답이 떠날 것이며, 언젠가는 자세히 설명해야 할 과제로 알지만 우선 여기서 간단히 대답할 의무를 느낀다.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객관성은 내세울 수 없다. 그러나 참 신학자는 성서에 그 생명을 건다. 성서는 연구해 보기 전에 하느님의 말씀임을 믿고 그리고 그 뚜껑을 열라는 말에는 복종할 수 없다. 아니! 성서는 연구해서 이해할 때만이 그 뜻에 복종할 수 있다. 성서의 성자는 사람들이 붙인 것이고, 그것은 원래 단순한 '책'이다. 그 책은 사람의 말로 쓰어졌다. 그러니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전에 하나의 사람들의 글이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작은 유다 민족의 역사와 그리스도인이란 소집단의 자리를 통해서 형성됐다. 따라서 적어도 이천 년 전의 세계관, 개념, 문장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성서를 읽으면 우선 이러한 수천 년의 시간적인 장벽에 부닥친다. 이 장벽을 뚫고 들어가기 전에는 거기에 담겨 있는 참 뜻을 만날 길이 없다. 전에는 '교회'라는 권위를 믿고 거기에 모든 것을 맡겼다. 그래서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 신부가 성찬의 떡을 입에 넣어 주듯이 교회에서 제공해 주는 것을 눈감고 입 벌려 받아먹으면 됐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우리에게 책임지고 골라 먹여 주는 권위도 없거니와 우리들 자신도 그런 권위를 승인하지 않는다. 신학자들이 이 장벽을 뚫기 위해서 괭이를 든 것은 불과 200년도 안 된다. 그러한 용기를 얻는 것은 계몽주의 덕분이다. 저들은 텍스트비판, 역사비판학적 방법 등을 통해서 오늘날은 마침내 통로를 뚫었으며, 지금도 그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래서 발견한 단층은 여러 겹이었다. 헬레니즘적인 겹을 뚫으니 초대 그리스도인의 역사적 상황, 그것을 뚫으니 케리그마, 그리고는 일단 이 작업이 정지되었다. 그 겹까지 뚫고 예수에게까지 이를 수 있는 통로는 막혔다. 그러나 최근에는 또다시 편집사적 연구 방법이라는 괭이를 들고 복음서 기자들의 사상을 파헤친다. 그러나 신학자들의 노고에서 전에 모르던 많은 것이 발견됐고 무한한 서광이 비추었다. 우리는 저들이 파놓은 길을 따라가는 길밖에 없다. 광맥은 발견된 것이다. 또 괭이질에서 작고 큰 금덩이도 많이 찾아냈다. 그래서 성서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직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어떻게 이름지어야 할지 모르나 성서는 나를 잡고 놓지 않는다. 성서에서 밝혀진 말씀은 남의 이야기 책 읽듯이 '오 그랬구나!' 해지지 않고 바로 내게 하는 물음으로 들리며,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할 의무를 느낀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이 바로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내게 향한 물음이 된다. 즉 성서는 내게 결단을 요구한다. 나는 그 요구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서 들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성서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것은 외적 권위보다는 바로 내 실재의 물음과 대답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신학이 열어 준 길이다. '그러면 불트만만 따르면 되나?' 천만에 나는 불트만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가 파고 들어간 길을 따라가 본다. 그는 결코 혼자 그 길을 뚫은 게 아니다. 아니, 짧게 잡는다고 해도 마르틴 루터가 첫 괭이질을 한 후에 계속된 수많은 학자들이 파고 들어간 그 광로를 진일보한 것뿐이다. 그는 하나의 광부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성실한 광부다.

그러나 그가 파낸 금 부스러기로 금반지를 만들 것인지 이를 고칠 것인지는 불트만이 명령할 권리도 없고 복종할 의무도 느끼지 않는다. 또 그가 파 나가던 방향이 그 다음의 광부에 의해서 달라질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의 성서 해석의 방법이나 분석에 나는 많이 의존한다. 그러나 그의 신학자적 결론(그를 실존 신학자라고 한다)은 내게는 절대가 아니다. 그것은 가변적인 것이다. 또 그 자신도 그런 고집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신학자적 결론에 영향받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의 결론이 내게는 가장 납득이 가기 때문에 나는 많은 부분 그에게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말을 했다거나 또 그의 대답이 완벽한 대답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아니! 아직 못 한 대답, 아직도 불투명한 대답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나는 학생들에게 신학적 계보를 따라 파고 들어가기를 권한다. 산중에서 홀로 여기저기를 한 번씩 삽질해서는 안 된다. 우물은 계속 한 곳을 파야 한다. 물줄기가 보이는데 왜 다른 데를 파랴!

그렇다고 내가 이미 불트만이 파 놓은 데까지 도달한 것도 아니다. 그가 파 놓은 길 따르기도 요원하다—그랬으면 좋게—그러나 나는 불트만의 노예는 아니며 그럴 마음도 없다. 나를 명령할 권리는 없다. 그런 뜻에서 성서는 내게 지상의 명령권을 가졌다. 그러면 '성서는 당신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요?'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대답을 꺼린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해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