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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늦었다

by 운영자 posted Oct 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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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늦었다

성서의 '너무 늦어'(zu Spat)라는 말은 성서의 심판관(審判官)에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되어 있다. 더 이상 만회할 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나는 옥중에서 한국 근세사에 초점을 모아 독서를 했다.

그동안 연발한 소리가 '이미 늦었다'였다. 무슨 운동, 운동 해서 구국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사를 준비하는 대목마다 '이미 늦었어'라고 중얼거리면서 읽어내려 갔다.

대원군의 개혁동학란개화정책갑오경장을미사변독립협회운동, 그 뒤의 의병봉기게릴라 조직 등이 모두 이미 늦은 때를 실감하게 했다는 말이다. 때를 놓치지 않으면 무너져 가는 집도 바로 지을 수 있고 허물어질 방파제도 개수할 수 있다. 그러나 실기(失機)하면 몇천 배의 힘이 가세해도 걷잡지 못한다.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다가도 그런 생각이 자주 인다. 가령 1925년에 서울 남산에 신사를 세웠는데, 그리고 35년에는 선교사들이 신사참배 문제로 퇴진했는데, 38년 장로교 총회가 강제로 소집되어 총대 두 명에 한 명꼴의 형사들 틈에서 신사참배를 제의, 가(可)면 묻고 부(否)는 묻지 않은 채 가결될 때까지,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 교회수 등은 자랑처럼 내세우는데 그게 어찌 한국 교회의 자랑거리가 되느냔 말이다. 적어도 13년 전에 그러한 전제의 초석이 섰을 때부터 손을 써야 했을 게 아닌가? 서울 남산에 선 것은 과거에는 우상이 아니었고 나 자신이 참배를 강요당할 때만 비로소 우상으로 둔갑하는가! 발 앞에 불덩이가 떨어졌을 때는 이미 늦은 때! 그러기에 그 위의 교회의 학교의 폐문교단 통합충성 강요친일파 난무의 과정은 방파제가 다 터진 후에 일어난 일이다.

주기철 목사를 가진 한국 교회를 자랑하는가? 그런데 그가 체포된 후 그가 담당했던 '장대재교회'의 문이 닫힌 후에 이에 항거하거나 그의 뒤를 따른 이가 얼마나 됐던가? 듣기로는 그 교회 폐문 후 해방이 될 때까지의 7년간 제직회 한 번 못 모았다고 하지 않나! 아니 그렇게 강도식으로 신사참배를 가결시킨 총회 다음에 힘과 열을 자랑하는 한국 교인들이 무얼했나?

따지고 보면 그게 공동체적 연대의식이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처럼 맥없이 항복할 수 있나!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나는 단적으로 종교적 이기주의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아무리 운집(雲集)해도 개개인의 구령(救靈)을 목적한 이기적 개인주의자들의 집회가 아닌가. 모두 자기 개인 구원을 위해서, 혼자 살기 위해서는 부모, 처자, 친척, 친구 다 버리고 자기만 도망하는 저 '천로역정'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저들을 모래를 가득 담은 자루와 비교한다. 자루가 터지면 모래는 모두 흩어지기에.

옛말하자는 게 아니다. 지금의 우리의 자세도 그렇단 말이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 '이미 늦었다'의 때 이전에 움직이지 않으면 그릇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없다.

오늘 한국에 얼마나 우상(偶像)이 난립해 가고 있는가! 웬 성역(聖域)이 그렇게 늘어가며,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대상이 왜 그리 많으며, 경건한 자세로 명상해야 하는 인간의 언어가 어찌 그리 많아져 가는가!

우상이란 상대적인 것이 절대화된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교 역사는 바로 우상과의 싸움으로 피를 뿌리며 자라오지 않았나! 그런데도 아직 내게 '직접', '구체적'으로 강요되지 않은 이상 오불관(吾不關)의 자세를 취해야 하나! 아니면 또 교묘한 변명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인가!

때가 늦으면 아무리 울고 발광을 해도 소용이 없다.

(197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