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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라는 유혹

by 운영자 posted Oct 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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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라는 유혹
마태 4, 8
1.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

사탄은 예수를 높은 산에 끌고 가서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이고 "다 주겠다"라고 하면서 예수를 시험한다. 단, 이때 조건은 "내게 절하면!"이다. 이것은 사탄에 의한 예수의 시험 장면에서 마지막 라 운드다. 이 장면은 앞선 두 종류의 예수의 시험과 비교하여 볼 때, 몇 가지 특징을 나타낸다.

첫째, 이유혹은 위의 두 가지와 다른 점은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이 없어졌다. 그 대신 "만일 내게 절하면"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의 아들이 된 것은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그는 이제는 독자적인 실권을 가진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는 실권을 완전히 받았다. 그는 이제 백척간두에 섰다. 이제 그는 더 오를 데는 없다. 그에게는 위는 없고 아래만 보인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내가 하기에 달려 있다. 이런 상태는 가장 무서운 최후적인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상태다.

이런 경우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들이 언제나 처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러한 예로서는 첫째, 권력, 돈, 지위, 명예, 인기가 고조를 이루었을 때, 대통령, 배우에게 이르기까지 그 도가 진해갈수록 이러한 유혹의 그물에서 벗어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둘째로, 더 이상 더 올라가거나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됐을 때, 기득권을 행사하려는 데로 옮겨졌을 때 나타난다. 이런 경우에 두 가지로 그 반응이 나타나는데, "내가 이제 뭐 더 바랄 게 있나?"라고 할 때는 자기대로의 고지에 섰다고 생각한다. '내게 더 다른 가능성이 있나?'라고 할 때는 신앙에서, 생활에서, 특히 나이가 많을수록 이러한 모습은 나타나기 쉽다.

2. 이런 경우의 유혹은 어떻게 오는가?

그 첫째, "기회다!" "철호의 찬스다!"라고 우리들이 생각할 때, 우리들을 꼬드긴다. 그 둘째, "잠깐만!" "잠시만!"이라고 하는 닥쳐오는 순간순간에 인간의 행동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으로 온다. 그 셋째, <실리적>이라는 그럴듯한 옷을 입고 나타난다. 넷째, <편리한 길>이라는 것이 인간을 매혹한다. 이 때, 타협, 안일, 목적을 위해서 수단은 상관없다. 우리는 이런 유혹을 얼마나 받는가? 이런 유혹이 우리를 간첩이 되게 만들고, 친구를 팔기도 하고, 거짓 증거도 하고, 돈으로 양심을 팔게도한다.

3. 예수의 경우, 이러한 유혹의 순간에 그가 택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사탄아 물러가라"! 이것은 그 순간이 그만큼 유혹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때, 사탄은 기회다, 잠깐이다, 구체적이다, 편리하다는 사실이다. 그 앞에 보인 것은 꼭 선악과와도 같다. 그걸 내놓은 것은 뱀같이 예수를 유혹한다. 이제 그에게 "편리냐 고난이냐", "의냐 불의냐", "나를 위하느냐 너를 위하느냐", "나를 팔아 영화를 받느냐 나를 죽여 진리를 수호하느냐"라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그러나 예수는 이때, 결국 "오직 하느님만 섬기라"라고 단호하게 말함으로 여러 가지 유혹들에 대한 분명한 선택을 한다. 여기서는 <만>이 있다. 우리가 섬길 것은 하느님 <만>이다. 여기 절대가 있다. 떡과 하느님의 말씀 중 하나를 선택할 상황에 <으로만>살 수 없다고 했는데 섬길 이는 하느님 <만>이다. 신앙의 대상, 궁극적인 것은 둘일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이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유혹에 빠진다. 그럴 때 <이럴러면>이 절대가 된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그것의 종이 된다. 그러므로 결국 그에 예속된다.

이 세계를 내 손에 넣어야 한다고 전제했다고 해도 그러기 위해서는 불의와 타협해야<만> 한다면, 예수는 세계를 내 손에 넣어야 한다고 전제를 차버려야하는 입장이다. 그러면 그 다음의 길은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그것은 수난이다. 몸으로 감당해야만하는 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유혹은 사랑하는 수제자격인 베드로를 통해서 또 한번 강력하게 다가왔다. 예수가 자신이 당할 수난을 예고 했을 때 베드로는 그를 가로막고 그런 길을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리고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 유혹이 강한 만큼 그의 단호함도 강렬했다.

4. '유혹의 시대', 우리들의 선택!

칼 라일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회색은 없고 흑 아니면 백만 있다"라고 말한다.

현대는 이른바 다원화 시대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그늘 밑에 민중과 대중이 혼돈되는 시대다. 이 마당에 판을 치는 것은 <상식>이라는 포장에 싸인 <적당히>가 절대의 자리에 앉게 된다. 모나게 살 필요가 없다. 대중이 가는 길을 가면 된다. 모가 나면 먼저 정을 맞는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둥글게 사는 거다.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 좋은 게 아니냐와 같은 속어가 이 적당주의를 잘 대변한다.

여기 오늘의 기술사회가 <편리>라는 이름의 무수한 애드벌룬을 연속 떠올린다. 되도록 편리하게 사는 게 가장 현명한 것이다. <편리>라는 것이 계속 인간답게라든지, 의를 위해서라는 따위의 모난 생각을 잠재우는 상품이 되어 유혹한다. 보다 편리하게 개량된 것을 소유 하기 위해 계속 가진 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게 한다. 바꿀 능력 이 없으면 월부로 사면 된다. 이렇게 <편리>따라 경쟁하는 삶에서 소비는 날로 커지고 따라서 계속 쫓기면서 살아야 한다. 이래서 결국 인간은 시간과 돈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살다보면 자기 꼴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편리>라는 유혹자는 그를 재빨리 잡아채어 가던 길로 가게 한다. 그러므로 이제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라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기울어지는 갈대가 되어가고 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예외자들인가? 아니라면 결국 그 사탄과 베드로의 편에 서서 예수의 길을 가로막거나 아니면 그를 소외해 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고도 교회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편리>라는 그물에 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