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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by 운영자 posted Oct 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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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여름내 더위가 무서워 두문불출하다가 이대로 새 학기를 맞으면 아무런 기분 전환도 없을 것 같아 더위를 무릅쓰고(사실은 이미 서늘해야 할 8월 중순인데) 무작정 떠났다. 어쩌면 어느 절로 갈까 아니면 호남으로 갈까? 그러나 아무 결정도 없는 채 대전으로 향했다. 더 위는 그대로 위력을 과시한다. 하여간 대전에 내려서 택시 운전사에게 여관 선택권을 주었다. 그런데 내던져진 여관에서 또 두 날을 두문불출 까닭은 역시 너무 더워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대전 가톨릭의 한 수도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두 가톨릭 친구들과 신흥종교의 집단지라는 계룡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계룡산이라는 말만 알 뿐 어딘지는 몰랐기에 동학사 쪽이 아니면 갑사 쪽이라고 생각하고 갑사행 버스를 탔다. 한 시간 반이나 걸렸을까? 갑사에 내려서 점심을 들고 여기 신흥종교 집단처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아는 사람은 없다.

한 스님을 만나 물었더니 갑사 위로 오르면 그런 사람들이 있는 듯하더라고 한다. 결국 잘못 들어섰던 것이다. 우연히 '신도안'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우선 갑사를 구경했다. 언젠가 신학교 졸 업생들과 함께 온 일이 있던 곳이다. 입구 도로변의 고목이 창연한데 막상 절로 들어서니 한국의 어느 절에서나 느껴지는 대로 그저 방치된 옛 터 같은 인상이다. 어떤 정신도, 정성도 어려 있음을 느낄 수 없어서 서운했다. 수도인들의 얼굴 표정이 바로 아무렇게 내팽개진 뜰 안의 거울처럼 보인다. 어떤 사찰에 들렀다가 하도 주변이 너저분 하기에 주지 스님에게 고언을 한마디했더니 자연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일본 불교와 다른 특성이라나?! 그런데 그게 자연대로여야지! 사람의 때가 묻고 그 손발에 의해 흩어져 있는 것도 자연대로인가? 정말 1500년 전 아도화상이 이 절을 창설했고 의상이 대사찰로 발전시켰다면 그 옛날 이곳을 찾아 이 산속에 터를 닦던 그들의 정신이 어찌 이곳을 이리 내버려 두고만 있었을까? 눈을 감고 100여 년 전의 그 얼들이 여기서 돌을 깎고 나무를 깎으면서 이 절을 지어가던 그 때에로 되돌아가려고 해도 눈앞의 것들이 그것마저 방해한다.

목적했던 곳이니 한사코 갈 생각으로 버스를 기다리다가 마침 들어선 택시를 타고 산골길을 터덜거리며 1시간 반이나 달려 이른바 '신도안'에 다다랐다. 이미 오후 3시이다. 동리에서 만난 사람에게 지금의 신흥종교 집단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각기 제소리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종교 전반에 흥미 없다는 자세들이다. 종교 범람에서 종교에 대한 염증을 느낀 이들이다. 어떤 이는 80여 개의, 어떤 이는 70여 개의 여러 종교들이 있다고 했고, 볼 것이 없다는 것을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하여간 산곡에 깔려 있는 산가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가다가 새로 페인트칠한 십자가를 단 교회당이 보이기에 그곳부터 찾아 사정을 물으려고 했더니 그게 바로 말썽 많은 '새일교회'다. 이 종파를 세운 자는 이뇌자(李雷子)라나!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산에서 집회하다가 벼락이 치고 대소동을 이룬 것을 자기가 바로 우뢰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해서 자기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나? 그런데 그 밤에 머문 여관 주인은 그 모임 때 하늘이 노해서 그 무리들을 혼비백산시켰다고 설명했다. 같은 일도 해석에 따라 이렇게 다른 현실도 날조할 수 있지!

이른바 '새일교회'에 들어서서 '공정한 정보'를 들으려고 했다. 한 농부 같은 사람이 우리가 겸손한 구도자로 보였든지 '새일교회'의 교리를 설명한다. 마침내 그는 떠나기 위해서 싸두었던 성경을 들고 나와 일대 사경회를 벌인다. 그 멍든 손에 들려진 성경은 붉은 줄과 손때로 젖어 있었다. 그만큼 그는 신념에서 불이 붙고 있었다. 날이 저물기에 말을 중단시키고 교리보다 이 집단의 사정을 들으려고 해도 한두 마디로 대답하고는 다시 교리 설명에 돌입한다. 이뇌자는 얼마 전에 죽은 시체 앞에 그의 추종자들이 모여 기도와 찬송을 계속했으나 점점 시체는 썩어, 결국 경찰의 강요로 매장했다는 신문 보도가 기억났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와 그가 준 교리에 이렇게 미칠 수 있음은 경탄스러웠다. 그가 성서를 풀이하는 것은 판에 박힌 것인데 성서는 이들의 무지, 아니 종교심에 되는대로 제물이 되고 있었다. 구약에서 동방이라고 한 데는 바로 한국, 산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산, 이 산에서 새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바로 전자의 출현, 새 일이 있으리라는 것은 심판, 그러니 이 심판은 곧 올 터인데 이 산에서만 구원의 새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 신흥종교는 정말 토착화의 선구이다. 그리고 민족적 주체 의식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인내의 덕을 기르고 싶었으나 날이 저물어 이른바 저들의 수도원에 올랐다. 산길을 타고 30여 분 만에 돌로 아무렇게나 지은 여러 채의 집들이었다. 아무리 불러도 인적이 없다. 한참 만에 임신한 듯한 젊은 부인이 불신의 눈초리로 우리가 온 이유를 묻는다. 수도원에 왔으니 이유도 간단할 터인데, 벌써 공세에 몰리고 있음은 그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온 뜻을 겸손히 이야기했더니 '여전도사'를 찾는다. 얼마 후 30대의 여인이 수군거리는 소리 뒤에 머리를 내민다.

똑같은 불안한 눈초리이다. 또 겸손을 다했더니 방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그리고 성경을 들고 마주한다. 서두부터 저 아래서 듣던 그 순서 그대로이다.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지금 저들의 교세를 탐문했다. 분명한 것을 말하려고 하지 않으나 이제 막다른 지경에 온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결국 날이 저물어서 내려가야 한다는 핑계로 나오는데 젊고 건강한, 그리고 조금도 구김살 없는 여인이 문 앞에 섰다. 그는 서울 명동 거리에 거닐어도 잘 어울리리라. 그런데 그가 바로 저 아래서 들었던 '새일교회'의 담당 전도사란다. 그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면서 나는 당신의 그 열린 표정을 보니 반갑다고 하면서 왜 저 산에 있는 이들의 표정이 저렇게 굳어 있느냐고 했다. 나는 이 여인은 이제 얼마 안 있어 하산 환속하리라고 생각하면서 그와 헤어졌다. 내려오는 길에 이 산가 저 산가(신전?)에서, 무당의 굿 소리에서, 염불 소리 등 정말 온갖 종교들의 혼음이 음란하는 것을 들으며 "여기 바로 우리 사회 병리학의 실험장이 있다"라고 생각하며 왠지 쓸쓸했다.

나는 저들을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들의 성서 해석법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대부분이 아직도하는 그것이다. 문자주의와 알레고리적(영적) 해석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 어느 구절들에 치중하느냐의 차이뿐이다. 아직도 문자주의와 영해를 고집하는 이들은 신학교보다 바로 저들이 적으로 아는 이런 데로 보내고 싶다. 만일 싸운다면 진흙탕의 개싸움이 될 것이고 승자가 난다면 저들일 듯하다. 까닭은 저들에게는 불타는 신념이 있고 그리고 치욕의 민족사에서 온 울분에서 민족의 긍지를 찾아 발돋움하려는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1973. 9.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