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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상

by 운영자 posted Oct 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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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상

한국신학대학의 학생들이 주최하는 신학회에서 '20세기의 신학도'란 주제로 작은 모임을 가진 일이 있다. 그 모임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상(像)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구약에는 예언자, 제사장, 서기관 등이 있는데 그리스도교는 그 중 어느 전통에 섰을까? 예수를 그리스도교의 기점으로 삼는다면 예언자의 전통에 섰으리라. 예언자의 특징은 기성 제도의 어느 틀에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야인적(野人的)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이나 그 집단 자체는 그러한 모습으로 이 세계에 침투해 들어갔다.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 이후에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공적(公的)인 국가 종교가 되고 하나의 거대한 조직을 이루면서부터 이런 전통은 후퇴되고 서기관과 제사의 전통에로 이변(移變)됨으로써 그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소시민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일제시대에 출발했기 때문에 어떤 제도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언자적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깊이 숙달하지 못했으면서도, 그 기백은 진취적이었다. 그것은 제도적으로 밀고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산 공동체로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제도화되어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부터 점점 제사종교, 서기관 종교화되어 가면서 그 힘을 읽어버렸다.

그것은 해방과 더불어였다. 해방과 더불어 이 땅에 미국의 세력 이 군림함으로써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틴 황제 이후의 종교의 모습을 지니기 시작했다. 대통령을 위시해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 그리스도교 편에 섬으로써 그런 모습은 더욱 뚜렷해졌다. 이로써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그 체질은 진취적인 데서 고착 상태로 들어 갔다. 시간적(역사적)인 자세에서 공간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그러한 단적인 증거가 그 내분이다. 그 내분은 다분히 어떤 정신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있는 것에 대한 권리를 점령하려는 싸움이었다. 교회 쟁탈전 등은 바로 공간을 점령하기 위한 싸움 이상이 아니다.

그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상은 이 사회에 적응하는 데 급급한 소시민적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활달한 자연인도 될 수 없었다. 까닭은 어느 구석에 폐쇄된 것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에게서 전수된 교리적 그리스도교는 변화된 세상에 대해 아무런 새로운 해석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생활과 관계 없이 마치 교리를 비닐 주머니에 넣은 채 삼킨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그리스도인 안에서는 일반인보다 오히려 옹고집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폐쇄적이다. 그러므로 점점 소심해지기만한다. 그래서 그 태도는 불신임직이고 계산적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것을 그대로 늘어내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위장의 기술만 드러났다. 이런 체질이 개인에서, 교회에서 풍겨 나온다. 이렇게 그대로 나아갈 수는 없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돌출구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면서 동양인이다. 그리스도교가 서구인의 손을 거쳐서 전수됐기에 그리스도인이면 서구적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는 전혀 없다.

우리는 동양적 인간상에서 잃었던 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까?

유교에는 군자(君子)라는 인간형이 있다. 불교에는 도승(道僧), 도교에는 선인(仙人)이라는 인간형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본래 모습은 어떤 것에 가까울까? 군자란 역시 기존 질서에 잘 적응하는 인간형이다. 그러나 불교의 도승이나 도교의 선인은 그런 틀 속에 한 자리를 가진 형은 아니다. 성서의 예언자, 제사장, 서기관형과 비교할 때 군자는 서기관형이라고 한다면 후자들은 예언자형과 유사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아주 호탕한 인간형이 퍽 많다. 그들은 일면 탕자적인 인상이 있으나 기존적인 것에 매이지 않는 자유의 기상을 갖고 있다. 그들은 유머와 비분강개로써 이 세상을 초연할 수도 있고 때로는 사자(獅子)처럼 기갈할 수 있는 인간형이다. 저들은 결코 소심하지 않다. 그들의 지향하는 바는 결코 물량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에 있었다. 그들은 이해관계에 있어서 초연할 수 있고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릴 수가 있었다. 그들은 기존적인 것에 어떤 자리도 없으나 때로 금관의 왕자로 군림하여 세상 사에 초연하면서도 어떤 폐쇄된 인간의 마음, 사회에 숨통을 뚫어주기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상은 이 사회가 제도화되고 서구화되어 가면서 그 자취를 감추기 시좌했다. 마치 율법화된 유다 사회에서 예언자가 사라졌듯이 …

그러나 우리 피에 그러한 기질이 잠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기질에 예언자적 기질을 접목함으로써 다시 살아나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게 어떻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하여간 큰 일을 꿈꾸는 것보다 그 기질의 혁명이 앞서야 할 것은 틀림없는 급선무가 아닌가!

(1972.6.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