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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화론

by 운영자 posted Oct 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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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화론

향린교회가 20주년을 지나더니 자각이 생긴 모양이다. 20년이라면 한 세대에 육박하는 셈이다.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나의 생의 거의 반을 향린교회와 더불어 보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인생이 늙은 듯이 향린교회도 늙었다. 어떻게 보면 용감하게도 20년을 보냈다. 담임 목사도 없이 지금까지 온 것을 보면 역시 사회학적으로만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20년이 지나서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어떤 전환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했기에 몇 해를 두고 다음의 방향을 모색했으나 번번이 뚜렷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가 강단을 주로 맡아 왔기 때문에 내 편에서 구체적 발의가 있어야 할 의무를 느꼈으나 번번이 지금까지의 체질에 미련이 있어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렇게 함께 지나는 동안 깊은 우정도 생기고 전통도 생겼다. 그러나 그런 것에 주저 앉아서도 안 되고 또 그런 것은 다음 길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선교 방법의 묘안이 나와서 마침내 당회에서 결의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묘한 선교 정책이란 교회 분화-선교 방법이다. 향린은 경제적으로나 인간 자원으로 일반 교회와 비교할 때 부한 편이다. 그런데 일 주 한 번씩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그 공동체를 꾸려가는 데 바치는 것이 고작이다. 원래 평신도 교회로 자라왔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까닭은 유능한 이들이 어떤 '그늘'에 있어 제 힘들을 발휘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돈이나 보내는 것으로 제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아는 자위의 자세에서 떠나서 몸소 선교 전선에로 분산하면 빨리 또 하나의 교회를 설립할 수 있다. 물론 교회 설립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되도록 다수가 선교의 일선에 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교회가 분가해서 새 선교 지역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이 인출된 면에도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이른바 대교회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미시오 데이'(missio Dei)를 말하고 세계를 위한 교회니, 봉사하는 교회니 하면서도 실제 두드러지게 노출되는 것은 '내 교회'주의다. 되도록 큰 건물, 많은 교인, 멋진 프로라는 데 집중하고, 되도록 저명한 많은 장로들을 옹위하여 제일을 시위해 보자는 경향이다. 일급 당회, 일급 찬양대, 일급 주일학교, 주목받는 교회 … 그러다 보니 다른 데로 향할 눈도 없고 겨를도 없다. 돈이나 힘이 생기면 요걸 갖추고 저걸 늘리고 하는 데 여념이 없는 것은 벌써 늙은 현상이다.

그러는 동안, 사장되는 것은 선교열이다. 대교회일수록 노련한 장로들이 우글거린다. 모두 주인 의식은 강하나 실제 선교 전선에서는 은퇴한 셈이다. 저들이 만일 일선에 설 수 있는 상황에 있다면 모두 단단히 한몫할 분들이다. 그런데 한 교회를 붙잡고 주인 의식만 기르다보니 본의 아니게 교회의 불화의 화근이 되며 목사의 선교열이나 후진들의 그것을 위축시키는 역할만 한다. 결국 장로란 많은 수가 아무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면서 권위 의식은 자란 유교조직의 진사니, 선달이니 하는 따위와 비슷한 묘한 위치에 있게 됐다. 저들은 이미 선교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선교의 주체는 못 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저들은 모두 일가를 이룬 경력과 힘을 가졌다. 저들이 일선에 서는 것은 노병을 일선에 보내는 것과도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들은 되도록 분가해야 이미 있는 교회도 살고 새 교회도 선다.

이러한 생각들이 향린교회의 당회로 하여금 분가 선교 방법을 생각해 내게 했다.

이것을 위해서 지금의 교회는 최대의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 자원해서 분가된 식구들은 새 터전에서 새로운 교회를 이루는 중축이 되어 새 사람들을 흡수한다. 이것을 실현하는 경우 향린교회는 적어도 수년 내로 양으로나 질로 지금의 3배의 성과를 거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장로는 많이 분화되어 수가 많아졌다. 그러나 불신이라면 분화가 아니라 분열이었다는 사실이다. 분화해야 할 것을 분화하지 않았으니 결국 쟁탈전이 되어 분열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니 큰 안목에서 보면 그것이 발전 과정이었다. 꼭 아메바의 분화처럼 그렇게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라도 의식적인 분화 운동을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또 분열이 아니면 한 교회 안에 파벌이 생겨서 이것도 저것도 못하고 목사나 괴롭히거나 갈아대는 일이다.

그러나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생활을 그대로 계속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위해서 어떤 공동적인 모색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한 현상이 이른바 '콤뮨'이라는 공동체이다. '콤뮨'이란 여러 가족이 한데 모여 한 단위의 생활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이들 문제나 가정 문제를 교대 분담하여 살아가는 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몇 가정이 단위가 되어 거기 가입된 가족들이 번갈아 가면서 어린아이들을 하루씩 떠맡는 것인데 아침에 출근할 때 그 아이들을 그 집에 맡기고 저녁 퇴근할 때 데리고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도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부 차원이나 사회 단체 또는 개인의 영업으로 탁아소를 확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런데 맡겨지게 되고, 주 1회 정도씩 부모 중 한 사람이 거기로 가서 아이들을 만난다. 이러니 부_모 자식간의 정이란 물론 과거의 그것에 다다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직계관계(直系關係)는 냉정해지고 그 대신 다른 아이들과 집단적으로 사는 결과를 가져온다. 여기서 기묘한 현상을 본다. 개인주의에서 출발해서 고립된 결과는 어쩔 수 없이 탈가족화하는 반면에 다른 차원에서 사회적 단위로 생활양상이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새로운 이념에서 사회화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에서 강요되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하여간 이런 과정에서 개인주의는 갈 데까지 갔으며, 그 과정 속에서 가족 제도를 위기에 몰아넣고 결과로는 다시 사회적으로 새 공동체를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개인주의적 인간을 혁명하여 다시 가족을 단위로 하는 복구에로, 아니면 전혀 새로운 공동체에로의 상륙 중 어느 하나에로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왔다.

(1976. 2.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