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_B_2s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by 운영자 posted Oct 02,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1

제 아무리 악이 횡포하고 정의가 짓밟혀도, 물리적 힘 외에 어떤 중재자도 없는 것 같은 현장에 살고 있어도,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편에서 볼 때 긴긴 인간 역사인데, 그리고 그 긴 세월을 통해 많고 많은 성현들의 가르침과 선한 인간들이 보다 나은 세계를 이룩하려 안간힘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역사는 아직 악순환을 거듭하며 빛줄기도 보이지 않는 암흑 같아도, 우리는 결코 이 역사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Logos)이 이 역사 안에 육체로 왔다는 사실 인카네이션, 화육(化肉)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역사가 그저 반복한다고 보지 않고 목적을 향해 진행하고 있음을 믿는다. 그것은 어떤 종점에 도달하려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신이 역사 안에 들어왔으므로 그의 목적대로 되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역사의 명멸(明滅)하는 현상만으로 울고 웃고 하지는 않는다.

신이 역사 속에 돌입(突入)한 화육 사건 이래로 역사에는 무의미한 것이 없다. 까닭은 이 역사는 무정란(無精卵)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이 역사상의 투쟁은 이 새 생명을 지키려는 힘과 그것을 해치우려는 힘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쟁(War)은 끝나고 전투(Battle)만이 남았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요, 우리의 신념이다.

한국에 이 같은 사실이 증거되고 그로 인해서 공동체가 형성되고, 이로써 이 역사에 대한 이해에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온다는 것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전환을 가져올 큰 사건이 될 것이다. 까닭은 우리는 오늘날까지 악순환의 과정 속에서 숙명론자가 되고 체념을 삶의 한 방식으로 알아 왔고, 불의에 대한 항거는 글자 그대로의 진멸(殄滅)로 응징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피땀의 결과가 그대로 악한 자의 손에 넘어가고 숨을 조이는 길고 긴 수난 속에서 울부짖고 절규해도 아무런 반응을 못 본 쓰디쓴 과거의 경험에서, 이제 희망이라는 말은 바로 기만의 상투어로 들리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이란 희랍신화에서 판도라 상자 속에 희망만이 갇히고 슬픔, 억울함, 음모, 질병 따위만이 나와 난무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희망은 막연한 미래에의 동경 따위가 아니며 우리 속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역사 밖에, 이 역사 안에, 그리고 내 안에 이미 돌입해서 현존하고 있기에 단순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안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2

성탄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다음의 자세는 자명하게 그 삶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성탄이 말씀이 육(肉)을 이루어 역사 속에 우리와 동거한다는 사실임을 믿는다면 체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체념은 노예가 되는 관문이며 숙명론의 노리개가 된 증거다. 화육이란 이 역사의 어떤 원리가 세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원'(生命源)이 이 역사 속에 들어왔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생명원은 정적(靜的)인 거점이거나 더욱기 계율(戒律)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개방된 가능성으로서 사람이 그를 만나므로 실현에로 이끄는 다이나믹한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의 뜻을 바로 파악한 사람은 재래의 고식적인 섭리론의 독소(毒素)에 멍든 삶을 털고 일어나야 할 것이다. 성서에 섭리론적 이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화육도 하느님의 오랜 섭리의 일환이 실현된 것이라는 신앙, 그러므로 구약을 인용하여 그러한 신앙을 입증하려고 하는데, 마태오복음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섭리론적 해석은 감격과 확신의 고백이지 결코 숙명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섭리론은 언제나 회고적 감격이지 미래를 측정하는 척도로 주어지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비록 화육의 사건도 섭리론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화육은 바로 우리에게 가능성으로 주어졌다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그 참 의미를 생활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념이란 있을 수 없다.

둘째는 이 역사에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당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화육의 뜻을 가장 뚜렷하게 밝힌 요한복음은 빛이 어두움 속에 들어옴으로 근원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을 선언한다. 요한복음은 빛과 어두움, 영과 육, 위와 아래 등 이차적인 표현을 빌려서 그 싸움의 대상을 설명하고 있지만, 요는 낡은 것과 새 것, 기존적인 것과 도래적인 것과의 충돌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세계관의 제시로서 관조자의 입장에 서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니 바로 이 사실을 믿은 사람은 이 싸움의 전선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이미 싸움은 시작됐고 그 싸움의 대상은 복면을 벗기 시작했으며, 이제 흑백이 분명히 갈라지는 판가름의 절정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을 하나의 평화의 상징으로만 알고 동화적 낭만주의의 표상 안에 안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탄설화를 전하는 마태오와 루가복음의 기록은 결코 낭만적 장면을 전하지는 않고 있다. 마태오는 헤로데의 증오와 질투 그리고 살의(殺意)의 서슬이 시퍼런 현장이 화육의 장임을 말하고, 루가는 인간사회에서 거부된 마굿간을 화육의 장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벌써 거부와 투쟁의 예시(豫示)인 것이다.

생명이 썩음과 진통 속에서 탄생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참 삶의 성장의 장은 바로 그 순을 자르려는 낡은 세력의 칼끝에 포위된 바로 거기이다. 그러므로 화육을 믿는 자라면 바로 투쟁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셋째, 성탄을 참 알고 맞이하는 이는 우리는 꼭 이긴다는 확신을 다시 다짐해야 한다. "꼭 이기지, 이겨!"

그런데 이기고 진다는 것은 잃고 얻고, 믿지고, 이익을 보고, 뺏고, 빼앗기고, 나아가서는 죽고 죽이는 차원에서 결정된다고 보아 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은 십자가에 달려서 '힘 없이' 죽어가는 예수가 "다 이루었다"고 한다. 이긴다는 것은 "내가 이긴다"라는 뜻이기 전에 '다 이룬다'는 뜻이다. 다 이룬다는 원어의 뜻은 '끝까지 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목적한 바, 시작한 것을 끝까지 관철했다는 뜻이다.

내가 이겨도 네가 이겨도 안 된다. 그가 이겨야 한다. 기존의 어느 것도 이긴 세력으로 정착돼서는 안 된다. 아니! 역사에 도래하는 새 세계의 막이 열려야 우리는 산다. 물론 우리는 그때 그때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된 것은 곧 다시 버려하는 것이며, 그것을 마치 궁극적인 것처럼 보수하려는 순간부터 우상이 되어 인간을 노예화하게 된다.

큰 악을 극복하기 위하여 적은 악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있다. 그런 논리를 인정하더라도 그 적은 악은 한번 쓰고는 곧 버려야 할 것이지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것이다!"라는 모세가 보낸 탐정대가 보고 외친 것 같은 것이 없는 현장에 있지 않다. 우리는 광야에의 대열에 끼어 있다.

우리는 이해에도 민족분단의 비극을 타개하는 데 일보의 전진도 없고, 국제관계에서는 이미 혈맹이니 우방이니 하는 말에 담긴 신의(信誼) 따위에 대한 기대가 신기루라는 것을 보기 시작했고, 그것은 미군철수 등으로 점점 분명해지고 있으며, 총화는 계속 외치되 대화의 출처도 막혀 있어 카프카의 성벽 밖에서 맴도는 상태이며, 민족방향의 제시로서 내놓은 충효가 근대화라는 구호와 어떻게 공존되는지 국민으로서 어떤 이의(異議)를 말할 수도 없으며, 경제제일주의를 구체적으로 표방하는 것으로 수출고를 과시하는데 오늘의 윤리적 타락은 그것과는 전혀 별개 문제로 착각하는 듯하며, 그마저도 경제 성장의 통계는 나와도 민족경제 안정의 신호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 있다.

이러한 현장에서 우리는 또다시 성탄을 맞이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재확인한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의 방향이 결코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집단, 어떤 권력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좌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까닭은 역사의 목적이 이미 역사에 화육된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모욕을 당하고, 비난받는 자들이여,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까닭은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기에 그 나라에서 받을 것이 많겠기에 먼저 간 모든 의로운 자들(예언자)의 반열에 설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