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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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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담아준다"고 했다. 그러면 입술로만, 입술만 놀리면 말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 뒤를 이어 하느님은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네게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예레 1, 9~10)고 한다. 즉 말은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은 삶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가 "말은 존재의 집이다"라고 한 것은 옳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서는 예언서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 즉 이 예언서는 다른 예언서와는 달리 예언을 그의 생애와 결부시켜 전승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자신도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의 전기, 즉 삶의 과정에 담아서 진술했는데, 그 붓을 넘겨받은 그의 동반자요 친구인 바루크가 예레미야의 생애를 첨부하여 예레미야서를 만듦으로써 예레미야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만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의 삶, 그의 일거일동 속에서 말씀된다는 신념을 입증했다.

다음, 예수의 경우에서도 그렇다. 특히 맨 처음 씌어진 마르코복음은 그 서두에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그가 이제부터 기록하는 내용 전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선언이다. 그러면서 마르코는 예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태를 추적하여 서술한다. 그가 죄인으로 낙인 찍힌 자, 가난한 무리, 병자들, 여인들, 즉 민중과 어떻게 살았는지,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진해서 처형당하기까지의 삶을 포함시켜 복음이라고 했다. 마르코에게는 교훈보다 그의 삶이 오히려 더 중요했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입으로만 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했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의 말씀의 절정이다.

이 점에서 바울로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서구전통에서 보듯이 그의 서신만 분석하여 그의 사상을 읽는 태도를 고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삶의 고백을 제외하고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고백은 수난으로 가득 차 있다.

심한 고역, 감옥에도 많이 가고, 매도 수없이 맞고, 돌로도 맞고, 이방인에게 자국인에게 수없는 박해를 받았다(고후 6, 4~5).

그러나 그는 자주 자신의 수난을 나타내나 자세히 말하지는 않는다. 그가 아시아에서 당한 수난도 말하나(고후 1, 8) 더 밝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마침내,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오. 내 몸에 예수의 스티그마(stigma, 낙인)가 찍혀 있습니다"(갈라 6, 17)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얻은 몸의 상처자국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로의 글은 이런 그의 삶과 결부시켜 읽어야 한다.

다음, 예수의 사건을 전하는 것은 바로 로마와 유다교에 항거하는 것과 같기에 저들의 증언은 입으로만 할 수 없고 그대로 몸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는 예수의 말씀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살던 그대로, 그의 지시대로 살기 위해 집도 고향도 다 버리고 두 벌 옷이나 돈도 가지지 않고 떠돌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많은 수난을 당하거나 죽은 이들도 많았다. 산상설교에서,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을 받아도 즐거워하라!"고 한 바로 저들은 이른바 '순회특혜자'라는 일꾼을 두고 한 말이다.

교회가 설립되는 돌풍인 오순절의 말의 사건도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몸으로 하는 말이다. 그것은 말이 곧 행위, 행위가 곧 말이 될 때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한편 삶과 유리되지 않는 말을 하면 거기에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른다. 예레미야는 40년을 제 민족에게 박해받기를 계속했고, 연금도 수없이 당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마침내 사형 대신 깊은 굴에 쓸어 넣어 거기에서 죽게 하려던 것을 그의 예언대로 쳐들어온 바빌론군에 의해서 구출되었다. 그리고 에집트 땅으로 가서 유랑민이 된 자기 민족과 더불어 살다가 그곳에서도 마침내 순교당했다는 전설이 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수난과 박해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일정한 성역에서 삶과 행위를 유리시킨 말이야 그것이 설교든 예언이든 고난당할 까닭이 없고, 그런 한 그것은 꼭 해야 할 말도 아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말과 행위, 그리고 말과 삶을 갈라놓고 행동과 유리된 말만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 풍조가 범람한다. 그것은 영과 육을 갈라서 생각하는 도피의 장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수계열일수록 말과 삶은 상반된다.

서구 신학의 영향도 이에 큰 몫을 한다. 서구의 신학은 최근까지 '말씀의 신학'으로 자신을 성격지었다. 그리고 '말씀의 신학'은 "결국 하느님의 현존은 설교를 하고 들을 때에만 구현된다"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른바 '케리그마 신학'이 그렇다. 케리그마 신학과 케리그마가 예수와 예수사건보다 먼저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케리그마가 먼저가 아니라 예수의 사건이 먼저이다. 이렇듯 사건과 유리된 말은 허상이다. 그러므로 이를 시정하기 위해 나는 '사건의 신학'을 내세웠다. 그것은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들은 체험에서 얻은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