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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난자와의 일치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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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고백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학문적인 성서해석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회의에서 내세운 주제대로 성서에 비친 그리스도의 고백을 한국의 상황에 주는 말로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가능한 대로 성서의 어느 텍스트가 지금 현재 수난당하는 형제들에게 중요하며, 어느 텍스트가 우리 상황을 늘 반영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수난자와의 일치

우리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를 한마디로 말하면 '일치화'(identification)입니다. 일치화는 우리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과제입니다. 우리는 독일과 같이 분단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른바 공업화를 통해서 교회와 정부 사이에 갈등이 극단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부와 국만 사이에도 그러합니다. 또한 우리 안의 여러 종교들 사이에도 긴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자체 안에서도 긴장은 계속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붙는 과제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담을 헐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수난자들과 일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과제는 '오늘의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과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치를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마태오복음 25장에 나오는 세계 심판의 비유를 연상합니다. 독일의 신약학자 슈니빈트(J. Schniewind)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했습니다.

"모두가 행위에 따라서 진행됩니다…… 그 세계 심판자는 사죄자입니다."

우리가 만일 전통적인 해석에 관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비유를 소박하게 보면 그 심판자는 단순히 고난당하는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고난당하는 자와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두 고난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남한에서 고난이 연속되는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가난하고 힘이 없기 때문에 산업화라는 슬로건 밑에서 그들의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정의가 불의한 권력에 의해서 배제되고 있습니다.

자기 양심에 충실하려고 하는 사람은 지체 없이 감옥으로 끌려갑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우리에게 계속 반복되는 물음, 비록 순진하나 생동하는 물음은 '하느님이 어디에서, 어떻게 실재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2) 동시에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덧없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이런 물음에 대답을 줍니다. 고난이 현재하는 바로 거기에 그 재판관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는 고난당하는 자와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불트만(R. Bultmann)은 이 비유에 대해서 "탈바꿈하는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쉬운 신학적인 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사고는 우리가 성서의 본래 말로 받아들이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고난당하는 자들과 자신을 일치시켰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고난당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당하는 자들과 그리고 동시에 고난당하는 예수와 우리를 일치시키는 근거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이 어디에서 어떻게 현존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예수와 우리와의 연대의식을 통해서 고난의 의미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이 텍스트(마태 25장)를 어떤 전제 없이 볼 때에는 이른바 그리스도교적이란 어떤 요소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가 자신과 일치시키는 고난당하는 자들이 왜 수난당했는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고 단지 배고프고, 목마르고, 병들고, 고향이 없고,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 이외엔 드러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는 자들이 보여주는, 자기가 행한 행위에 대한 무식함이 바로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전혀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상관없는 것으로 보게 만듭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텍스트를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우리에게 준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불트만 자신은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의 구별은 이 본문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로 그는 이 비유의 가치를 왜소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반대로 행복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서 안에 이런 비유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유에서 열거되는 고난이 전형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러한 소견은 여기서 고난당하는 내용을 윤리적인 덕목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그것을 윤리적인 덕목으로 보지 않고 구체적인 경우들을 단순하게 표현한 서술이라고 봅니다.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이 비유에서 '감옥에 갇힌 자'를 언급한 것은 유다 전통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러한 예외적이라는 이 사실이 이 텍스트를 더욱 생동적인 것으로 보게 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예의성은 오히려 그것의 구체성을 그만큼 더 입증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