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_A_5s

소명(召命)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소명(召命)

공자는 50세에 천명(天命)을 알았다고 한다. 그가 50세가 되던 때에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늘에서 지시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지시를 어떻게 받았나? 그의 짧은 자서전적 표현에 따르면 15세에 학(學)에 뜻을 두게 되었고, 30세에 확고한 자기 입장을 세우고, 40세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자립적이 되었다고 하며, 50세에 비로소 하늘의 명(命)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자기의 삶을 하나하나 벽돌 쌓듯 쌓아올라감으로써 마침내 자기가 세상에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할 일과 자기 발견이 함께 확실하게 인식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 60세에 이해하는 능력이 원숙해져서 귀가 들을 말과 안 들을 말을 가려 들을 줄 알 뿐 아니라 그 깊은 뜻을 전체로서 이해하게 되었고, 70세에 와서는 마음의 소원과 감성(情)적인 것과 지적인 것이 일치되어서 무엇이나 마음 놓고 해도 실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공자의 이력서를 보면 그의 생애에서 50세가 획기적인 것이었으나 거기에는 바울로에게서 보는 것 같은 전향의 의미는 없고, 사는 길에 있어서 곡식이 자라다가 열매를 맺기 시작한 때와 견줄 만한 단계 정도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50세 이후에도 새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것이 익어서 열매를 거두게 되는 과정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와 달리 싯다르타는 소명이란 점에서 공자와 구별되는데, 그는 보리수 밑에서 수도하던 끝에 마침내 법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선정삼매(禪定三昧) 속에 12인연을 아래에서 위로 또는 위에서 아래로 관찰하기도 하며, 모든 법이 인연을 따라 소멸하는 우주의 진리를 모두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서 37일을 지낸다. 이때 그는 "이 곳에는 모든 번뇌가 다하고 나의 할 일은 끝났다"라고 말한다. 이런 해탈의 경지에 선 그는 "나는 차라리 잠자코 니르바나에 드는 것이 옳으리라"고 한다. 지금까지의 수련은 그 자신이 니르바나에 들어가기 위한 일이었고, 이제 그 경지에 이르렀으니 다른 것이 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그는 홀로 자신 안에서 충족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대범천왕(大梵天王)은 이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고뇌의 세상에서 싸워 이겨 최상의 정각(正覺)을 성취했으면 그 깨달은 바를 중생을 위해 설법해야 할 것이 아닌가! 여러 사람이 이러한 뜻을 간청하기에 마침내 그는 대비원력(大悲願力)을 발휘하여 도전하기를 40년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비원력이 그의 소명의 내용이다.

그의 득도와 이 소명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 그것은 분명한 전환점이다. 득도는 지금까지는 한 존재로서의 자기완성을 목표로 모든 정력을 기울여 그 목표에 도달한 것인데 반해, 소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명은 그에게 분명히 삶의 분수령과 같은 것으로 공자의 경우와는 다르다. 공자에게는 방향전환이 없는 데 반해 싯다르타에게는 '나에게서 너에게로'라는 분명한 전환이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소명이다.

예수의 경우는 이와 또 다르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40일 동안 광야에서 홀로 투쟁했다는 이야기는 크게 보아 석가의 소명 전야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가 공생애에 발을 내딛는 계기를 마르코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는 갈릴래아로 갔다"(1, 14)라고 서술한다.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정치적 사건이 그의 소명을 실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는 어떤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소명은 '때'에 대한 인식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생애의 첫 선언은 '때가 찼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공자와 대비해볼 만 하다. 예수와 공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공자는 자기 성장의 어느 단계를 소명(天命)과 결부시킨 데 반해 예수는 바로 역사적인 때를 자기 소명의 때로 보았다.

바울로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바울로의 경우는 위의 세 가지와 상당히 다르다. 바울로의 소명의식이 위의 경우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병행시켜 생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