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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희망과 세계혁명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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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희망과 세계혁명

내가 온 것은 : "복음을 믿으라"는 간단한 표현은 희망에서 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나라로의 초대의 소리와 같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으니 어서 오라는 초대의 소리가 바로 복음이며 이 초대에 응하는 행위가 바로 회개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이 역사에서의 시비나 곡절을 그대로 내팽개친 채 다른 세계로 이동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예수가 지상에 온 뜻도 이렇게 선언된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 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루가 4, 18~19).

이상은 이사야 61장 1~2절의 내용을 70인역(LXX)에서 인용한 것이다. 히브리 역에는 70인역에다 "마음 상한 자를 고치고, 갇힌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슬픈 자를 위로한다"는 것이 더불어 있다. 이것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한 말의 내용과 유사하다.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 2~5).

이것은 예수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역시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한 구약에 있는 예언의 말을 빌려서 나타내고 있다. 그의 사명은 당시의 구체적인 예속에서의 해방이다. 그것은 인간의 희망과 직결되어 있다. 포로된 자, 눌린 자, 슬퍼하는 자, 상처를 받은 자 그리고 질병 또는 사회의 부조리에 의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더러워지고 죽음에 이른 자들 전체를 포괄한 것이 바로 '가난한 자'들이다. 이것은 인간의 구체적인 고뇌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피압박자들의 상태로서 바로 예수 당시에 사실상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었다.

그러면 이런 자들을 해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포로 된 자들, 눌린 자들을 해방한다는 것은 저들을 속박하고 억누르는 힘과의 대결 없이는 불가능하다. 슬퍼하고 상처를 받은 자, 보고 듣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는 자들을 해방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제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러한 인간에게 해방 또는 자유를 선포한다는 것은 바로 '혁명'을 뜻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상 예수는 가난한 자, 병든 자 그리고 죄인, 여인 등 그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섰고 저들의 친구가 되었다. 예수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 마태 9, 13)는 선언이라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내게로 오라"(마태 11, 28)고 한 것 등은 그의 사명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 또는 무거운 짐 진 자들이란 유다 사회에서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본 것일 수 있으나, 현금의 사회에서 보면 결코 종교적으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까닭은 당시의 유다 사회에서는 종교적인 것과 사회구조적인 것이 유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가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회구조에 대한 도전이었다. 가난한 자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의 가치관과 그 가치관에 기초하여 세워진 질서를 파괴했기 때문에 추방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바로 그러한 자들의 편에 선다는 것은 체제적인 저항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당시의 지도층은 그런 예수를 적대시했으며 마침내 정죄하여 처형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역사의 한 시점에 형성된 권력이나 부조리를 제거하는, 이른바 혁명 자체에 궁극적 희망을 건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낡은 것을 파괴 또는 제거하면 인간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리라고 낙관하지는 않았다. 그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르다. 예수의 희망의 순서는 거꾸로이다. 사회의 부조리가 제거되면 새로운 세계가 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도래가 낡은 사회의 구조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밤이 지나면 낮이 온다가 아니라 낮이 오므로 밤이 추방당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그의 첫 선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며, 그 도래에 대한 준비가 바로 이 세계를 향한 비판과 선고가 된다. 그러므로 회개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때가 찼고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선언이 앞선다. 그러므로 그는 이른바 혁명가가 아니라 예언자이다.

 

복음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다"(루가 6, 20)로 시작되는 축복들은 역사 안에 있는 인간을 향한 희망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 희망들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그 내용을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주목해보자.

첫째, 마태오복음에서의 축복(마태 5, 3~10)들은 가난한 자, 애통해하는 자, 주리고 목마른 자, 박해를 받는 자 등 결핍상태에서 새 것을 기다리는 자들을 향한 축복과 온유한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깨끗한 자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 등 윤리도덕적인 가치를 지닌 자들을 향한 축복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같은 근원에 의한 것으로 판정되는 루가복음의 축복대상은 전자에 속하는 것만이 있다(루가 6, 20~23). 아마도 마태오와 루가에 공통된 것들이 원래의 축복의 대상이었으리라.

둘째, 그렇게 볼 때 주목할 것은 그 축복의 대상이 내용상 예수가 오신 목적의 내용과 같다는 사실이다. 왜 가난한 자, 애통해하는 자, 굶주린 자, 박해를 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인가? 만일 그런 상태 자체가 복이 있다는 것이라면 지금 당하고 있는 처지에 만족하라는 아편과 같은 소리로서 기존질서를 영구화하려는 힘에 가담하고 도와 주는 결과밖에 안 될 것이다. 지금은 가난하나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며, 지금은 굶주리고 있으나 배부를 것이며, 지금 슬피 울고 있으나 기뻐 웃게 될 것이며, 지금은 박해를 받으나 기뻐 춤을 추게 될 것이라고 한다. 만일에 장차의 일이 피안에서의 일이라면 이 말들은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참으라는 자장가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나라는 바로 이 역사 안에 도래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현실에서의 삶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위로의 말이 아니다.

왜 가난하고 슬퍼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인가? 저들은 현재의 상황에 맞게 자기를 적응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저들은 바로 '희망'에 의해서 '현재'를 산다. '희망'으로 살기 때문에 현재의 힘들과 타협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저들은 고난을 당한다. 저들이 당하는 고난은 아주 구체적이다. 그 내용은 생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의 축복은 바로 저들을 저럴 수밖에 없게 하는 현재의 힘들에 대한 선전포고와도 같은 것이다.

셋째,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그 축복의 대상에 대해 이른바 종교적인 특수영역에서 요청하는 어떤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가령 유대교에서 본다면 율법을 지킨 자,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 등이 반드시 축복의 대상으로 열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특수한 범주에서의 노력과는 상관이 없으며, 그러한 노력들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축복은 '종교'라는 특수영역에 있는 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축복은 바로 이 역사의 한복판에서 '희망'에 의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왜 저들은 가난한가? 왜 저들은 굶주려야하는가? 왜 저들은 슬피 울어야 하는가? 누가 저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욕하고 누명을 씌우는가? 기독교 역사는 오랫동안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내심(內心)의 문제로 처리해버렸다. 이런 경향은 마태오에서 이미 싹이 텄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에게 '마음이'라는 것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 축복을 듣는 자들은 누가 저들을 저토록 가난하게 하며 슬퍼하게 했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 루가복음은 이 축복과 병행하여 너희 부요한 자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기뻐 웃는 사람들, 지금 칭찬을 받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고 한다(루가 6, 24~26). 누가 부요한가? 누가 지금 웃으며 칭찬을 받는가? 저들은 오늘의 지배자들이 아니겠는가? 오늘을 지배하는 자들은 오늘의 권력자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저들에게 왜 화가 있을까? 만약 부요하고 배부르고 기뻐하고 칭찬받는 것 자체가 화근이라면 지금 가난한 자들, 우는 자들을 향한 축복은 바로 저들에게는 저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부요한 것 자체가 저주의 이유일 수 없다.

저들은 남의 것을 빼앗음으로 부요해졌다. 저들은 가치관과 사회 구조를 자기들 중심으로 형성함으로써 부와 행복과 영화를 독차지했다. 그러므로 무수한 사람들을 가난과 굶주림으로 몰아넣었고, 그 질서를 고수하기 위해 힘없는 저들을 박해하고 억누를 뿐 아니라, 그러면서도 저들을 존경하는 찬사를 강요했다. 이 세계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리며"(마르 10, 42), 임금들이 백성을 지배하며 집권자들을 '공로자'라고 부른다(루가 22, 25). 유대교 지도자들은 남에게 인사를 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만 찾고 "과부의 집을 삼켜버리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마르 12, 38~40). 저들은 자기가 지기 어려운 짐도 남에게 지우면서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루가 11, 46). 이런 비판 둘은 모두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착취자들의 모습에 대한 것들이다. 저들은 한마디로 말해 부요한 자들이다. 저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이 없다. 차라리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는 있어도(마태 19, 24) …….

그러나 예수는 계급투쟁을 선언한 것도, 그렇다고 그런 투쟁에 새 것에의 희망을 건 것도 아니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위한 투쟁을 권하거나 권력을 뺏기 위한 권력투쟁을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먼저 그 나라와 의(義)를 구하라고 한다(마태 6, 33). 까닭은 예수는 참 희망을 그 나라와 의가 실현되는 데 걸고 있기 때문이다. 또 예수는 너희는 이 세계 통치자와 같아서는 안 된다고 하고 오히려 남을 섬길 것을 요구하고 있다(마르 10, 4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