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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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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게라사의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는 마르코복음 1장 21절 이하의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치유이야기와 더불어 귀신 쫓는 이야기의 전형이다.42)R. Bultmann, a.a.O., S. 224/ 한역본 262면. 그 귀신들린 자가 큰소리로 예수의 정체를 알리면서 저항하는 것, 예수가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한 것, 들어온 귀신이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가는 것(27절),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놀란 것(27절), 그리고 이 소문이 갈릴래아 일대에 퍼졌다는 것(28절) 등과 같은 1장의 이야기의 틀을 게라사의 귀신을 쫓는 이야기(5, 1~20)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1장에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축소해 버리고 그 외의 것은 여기에서 발전된 것이라거나 마르코의 편집구라고 제거해 버리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가령 5장 18절 등은 마르코의 편집구로 돌릴 수 있으나 중복 또는 과장된 부분들(가령 16절 혹은 16~1819a절)을 마르코의 편집구로 돌려버리려는 데는43)J. Gnilka, Mk, I, S. 194/ 한역본 258면 이하. 아라이는 2절b~15절, 19절b만 전승자료이고 그외는 마르코의 편집구로 본다. 동의할 수 없다. 까닭은 민중전승이 구전단계에서 확대될 수 있으며, 중복 등을 오히려 강조의 방법으로 애용하는 것이 민중이야기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세 단락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것은 치유이야기 자체(1~13절), 목격자들의 반응(14~17절), 귀신들렸던 자의 행위(18~20절)이다.

이 사건의 현장은 이방 땅이다. 마카베오 시대에는 유다 영역에 속했으나 로마가 그것을 헤로데의 영역에서 배제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땅은 문화적으로나 주민의 시각에서 볼 때 순수 이방 지대라 하기는 어렵다. 마르코는 그 장소를 게라사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다(호수)에서 60킬로미터나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전개와 어울리지 않으므로 마태오는 호수에서 훨씬 가까운 가다라로 바꾸고 있다(8, 28).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곳이 이방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점이다.

예수는 그곳에 도착하자 무덤 사이에 있는 귀신들린 자를 만난다. 유다 민속신앙에는 무덤 혹은 공동묘지가 귀신들이 좋아하는 거처로 되어 있다.44)Böcher, Christus Exorcista, S. 74f. 그곳은 사회에서 격리된 장소이다. 산 사람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죽은 자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셈이다. 이 사람은 쇠사슬이나 쇠고랑으로도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난폭했다(마르 5, 4). 그는 밤낮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비록 강포했으나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치며 무엇인가를 위해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수를 보자 달려와 엎드려 큰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여, 나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마르 5, 6~7)라고 애걸한다. 이것을 놓고 귀신이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이른바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 삼으려는 사람도 있으나45)W. Schmithals, Das Evangelium nach Markus, S. 166.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를 만남으로써 무서운 갈등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예수는 그에게 이름을 물었는데 그의 대답이 주목된다. "제 이름은 레기온입니다. 우리의 수효가 많기 때문입니다"(9절). 그는 여기서 단수와 복수를 번갈아 쓰고 있다. 홀렌바흐는 여기서 정신병자의 실상을 찾아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분열이다.46)P. W. Hollenbach, a.a.O., S. 579. 그 안에서 '나'와 '우리'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그 '나'는 귀신들린 자 자신일 것이고 '우리'는 바로 귀신의 집단성을 나타낸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신약에서 유일하게 보는 '레기온'이라는 말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6천에서 1만 명에 이르는 로마병력의 단위를 표시하는 군사용어로47)Biller., II, S. 9. 일개 사단에 해당한다. 그러면 이 귀신은 바로 로마의 군대와 관련된 것이다. 그는 또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여기에서는 분명하게 레기온이라는 이름의 귀신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의 군대라고 하면 데카폴리스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대임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레기온은 그들의 주변에 있는 돼지떼에게 보내서 그 속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이것은 예수에게 이미 항복했다는 의미와 더불어 어떤 형태로나마 살아 남으려고 하는 몸부림의 표현인데, 이는 이방인과 돼지를 부정하다는 의미에서48)이사 65, 4. 함께 취급하고 있는 유다 사회의 관념에서 나온 발상으로 로마군대와 돼지를 일치시킨 것이다. 로마군대가 머물 곳은 사람 안이 아니라 돼지 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것을 쉽게 허락한다(13절). 그러나 이 레기온의 소원은 몰락으로 끝을 맺는다. 2천 마리의 돼지떼가 한꺼번에 바다에 빠져 죽기 때문이다(13절).49)C. H. Cave, The Obedience of unclean Spirities, NTS, 11(1964/ 65), p. 97.

이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민중의 소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무덤에서 자기분열로 고통받는 사람은 바로 로마세력과의 모순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상을 나타내는 것이며, 로마군대를 추방함으로써 그가 자기를 다시 찾았다는 이야기는 예수와의 만남에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동리 사람의 반응은 우리의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한다. 그 광인이 성한 사람이 된 것을 본 동리 사람들은 예수에게 그 동리에서 떠나달라고 한다. 왜 그랬을까? 이 이야기를 그리스도론의 시각에서 풀이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건 앞에서의 공포 때문이라고 처리해 버린다.50)E. Haenchen, Der Weg Jesu, S. 195.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인 동인이 강력하게 노출된 이야기로서51)P. Winter, On the TIrial of Jesus, 1901, p. 129; J. Gnilka, Mk, I, S. 205/ 한역본 262면, 「반로마적 경향」 로마제국과의 투쟁을 반영하는 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지방 사람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받을 탄압을 두려워하여 예수를 추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성격화해 보자.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정당하다면 이 이야기는 민중운동의 극치를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 민중운동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직결되는데, 그것은 실제적인 행위로서는 사탄의 추방으로 집약된다. 그런데 식민지인을 미치게 한 그 사탄은 바로 로마제국이라고 함으로써 사탄을 비신화화했다. 이로써 예수의 민중운동은 로마제국과의 대결이라는 풀이가 성립된다. 로마제국을 돼지와 연결시킨 것은 민중들의 로마에 대한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다. 돼지는 이미 위에서 본 대로 가장 더러운 것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레기온이 더러운 돼지 속에 들어가서라도 그곳에 잔류하기를 소원했다는 것은 저들의 체질을 해학적으로 야유한 것이다. 즉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민과의 관계는 아랑곳없이 목적달성을 위해 식민지를 장악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사탄이 처음부터 예수의 권위를 인정했으며 그에게 구걸했다는 사실에는 예수가 로마제국에 대해 단연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민중들의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 마침내 예수는 그 레기온이 원하는 대로 돼지떼 속으로 추방함으로써 예수의 로마에 대한 감정을 드러낸다.52)마태오복음에는 없다: 그러나 야훼가 합비루를 추격하던 에집트군을 전부 바다 속에 쳐 넣은 해방사건처럼 저들을 몽땅 바다 속에 쓸어 넣어 버린다. 이로써 그 게라사의 사람은 회복된다.

귀신들림은 바로 로마제국에 점유되어 고통을 당하고 자기분열을 일으킨 현상이며, 따라서 귀신들린 자는 그 귀신을 추방함으로써 비로소 자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건은 결국 로마제국 자체가 귀신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의 현장을 경험한 동리 사람들이 예수에게 자기들로부터 떠나달라고 하는데, 이 이야기의 문맥으로 보면 물론 바다에 빠진 돼지가 아까워서는 아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치유된 일과 돼지에게 발생한 일을 듣고 그러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로 말미암아 일어날 로마제국의 박해가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민중운동이 반로마운동으로 확대되어 그 동리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써 피해를 입게 될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말하자면, 그 동리 사람들은 식민지 하에서의 삶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아래에서 정착하려는 무리였다는 말이 된다.

이에 반해서 귀신들렸던 사람은 그러한 동리를 탈출하여 예수와 합류하기를 원한다(마르 5, 16).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그를 그의 뿌리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한다. 이것이 단순한 사회복귀 명령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것은 예수 자산도 그가 경험한 사건을 이야기하라고 했으며, 그 말에 따라 그는 데카폴리스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이 사건을 전파했다고 하기 때문이다(마르 5, 19~20). 예수가 명한 것과 그 사람이 행한 일 사이에는 단절이 없다. 사건이 연이어 확대 전개되는 것이다. 헬라어 카이(καί)라는 접속사는 그러므로 예수의 명령과 그의 행위 사이를 절묘하게 이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귀신들림에서 해방된 그 사람이 데카폴리스에서 행한 일은 무엇일까? 이미 앞에서 암시했듯이 반로마 민중운동을 확산시켰다고 보는 것이 옳다. 비록 단순하게 자기를 귀신들림에서 해방시킨 예수의 행위를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레기온을 추방하는 이야기인 한 그 이야기 전파행위 자체가 민중운동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시각에서 보면 "가난한 자,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가 6, 20)라는 선포를 원용하여, "병자, 귀신들린 자,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루가복음 4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예수의 공생애 선언(18절), 세례자 요한에게 전하라는 말인 예수의 자기 증언에서도(루가 7, 22)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서 병자들이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