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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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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역사적 예수'라는 테마를 추구하면서 공관복음서 연구의 해석학적 방법에서는 불트만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지만, 민족에 대한 변함 없는 관심에서 예수를 정치적 시각으로 보는 사상적 흐름을 줄곧 견지하고 계셨군요. 그렇게 보면 1970년대에 '민중신학'을 제창하시게 된 것도 어떤 우연한 돌발사나 방향전환이라기보다는 민족문제정치신학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어떤 질적 비약이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그렇지요. 1970년대에 와서 갑자기 내 신학의 방향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내가 쓴 옛 글들을 들추어보니까 이미 1960년대초부터 '민중'이란 말을 자주 쓰고 있었어요. 당시에는 '민중'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으나 '민중적 설움' '민족적 민중' '민중적 민족'들이 불가분리로 서로 엉켜 나의 관심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 당시의 글을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실로 우리 민족과 민중은 서로 분리가 안 돼요. 우리 민족이 곧 민중이니까요. 강대국에 언제나 짓밟히고 수탈당해 온 민족, 이 민족의 설움이 곧 민중의 설움이고 또 그 반대로도 말할 수 있지요. 지배층에 의해서 억눌리고 빼앗기는 민중의 한맺힌 설움이 민족적 설움과 겹쳐 있어서 그 둘이 절대로 구분이 안 돼요.

▶ 정치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이나 참여를 하신 일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시지요.

예. 1962년이었던가요? 함석헌 선생님이 독일에 오셨을 때, "선생님,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렇게 여행하고 계십니까? 빨리 돌아 가셔야 합니다!" 하면서 신문을 앞에 놓고 국내 형편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점심 잡수시다가 낙루(落淚)하시고 그 길로 보따리 싸 가지고 귀국하셨지요. 서울로 돌아가시자마자 장준하 선생하고 서울 대광고등학교에서 시국강연회를 여시고 지방 여러 곳에서 강연회를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선생님이 정치문제에 데뷔하신 처음 일이었습니다. 함 선생님은 나 때문에 망쳤다고 지금도 늘 농담하시지요. 또 맥주도 나 때문에 마시게 되었다고 원망하시고……(웃음). 정치 현실에 대한 그런 관심이 내겐 늘 있었지요.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1969년 삼선개헌 때였습니다. 개헌반대 100만인 서명운동에 열한 번째로 내가 들어갔는데 그것은 장준하 선생의 권유로 된 일이지요. 그 분은 나더러 정치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밤낮 성화였어요.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정치운동에 참여시키려고 애를 썼지요. 지금 생각해도 그분이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보다 조금 전에 동백림사건(1967년) 때 한 번 끌려가서 눈앞이 캄캄하도록 모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해봤습니다. 그게 첫경험이었는데, 이런 일은 결코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개헌반대 서명하고 끌려가서 똑같은 모욕을 당했어요. 그때부터 정보부에 드나드는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 70년대에는 선생님의 생애에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경험하셨고, 그 경험을 통하여 선생님의 신학이 '민중신학'이라는 모습으로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선생님께서 한평생 놓지 않으셨던 '역사적 예수'에의 추구가 어떠한 신학적 관련 속에서 '민중신학'으로 결실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하군요.

내가 '민중'을 신학의 테마로 해서 글을 쓴 것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예수와 민중(=오클로스)」이라는 짤막한 글을 쓴 것이 1972년이었으니까요. 감옥에 들어가기 3년 전이었지요. 나는 민중의 고난을 한 개인의 고난으로 보지 않고 집단적인 고난이라고 보았어요. 어느 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집단이 당할 고난을 그가 대신해서 당하는 것뿐이다, 즉 집단을 대신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군사독재가 들어서면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투옥되었지요. 그럴 때 그 독재 아래 있는 사람들을 다 민중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 가슴에 사무쳤고, 이것이 바로 민족의 한(恨), 민중의 한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그것에 대한 해답을 성서에서 찾다가 발견한 것이 '오클로스'(ochlos)였습니다. 성서에는 민중을 표시하는 두 가지 그리스어가 있어요. 하나는 '라오스'(laos)이고 또 하나는 '오클로스'입니다. 라오스는 오늘의 '국민'과 통하는 말로 어떤 집단권내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 민중의 칭호인데 반해서 오클로스는 권외(圈外)에 있는,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를 무조건 따르며 예수에게 희망을 건 사람들을 '라오스'라고 하지 않고 '오클로스'라고 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오클로스에 관심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모든 것―신도, 예수도, 성령도―을 '인격'(persona)으로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냐?' 하고 '누구냐'만 물어요. 그래서 예수도 '어떤, 어떤 인격이다'라는 답을 얻고, 거기에 안주하고 말아요. 그러나 나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수는 하나의 사건이다!' '하느님도 사건이다!' 나는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인격으로 본 것은 틀렸다, 잘못 본 것이다!'이 깨달음이 내 신학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사건'이지, 왜 '인격'이냐? '2천 년 전에 팔레스틴 갈릴래아에 살았던 예수 개인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사건이 중요하지!' 이 깨달음이 뒤늦게나마 내게 온 것이지요. '사건으로서의 예수', 이것이 고리가 되어 나의 역사적 예수의 추구는 민중신학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면서도 그의 인격에 매료되어 개인으로서의 예수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건으로서의 예수, 즉 '예수사건'으로서 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니까 역사적 예수로 접근하는 큰 신작로가 열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서구 신학자들은 이른바 '말씀의 신학'이라고 해서 예수를 '말'의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말씀에서보다 '십자가'라는 '사건'에서 성립한 것입니다. 바울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수많은 설교를 통해서 말하다가 감옥에 잡혀들어가 수난을 당하는 사건이 계기가 되어 복음전파에 진전을 가져왔어요. 나는 여기에 착안해서 '사건의 신학'이라는 것을 제창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민중의 사건, 집단적 사건으로 보고 있어요. 그 사건(예수사건)은 결코 2천 년 전에 일회적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역사 전반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겁니다. 이렇게 보면, 사건의 신학은 아주 자연스럽게 민중의 신학으로 연결됩니다. 독일 신학자 몰트만(J. Moltmann)은 '예수가 곧 민중이다'라는 내 주장에 반대하여 토론을 걸어왔는데, 그것은 그가 예수를 '인격'으로 보니까 그렇지, 사건으로 보면 하등 문제 될 게 없어요. 예수는 사건입니다. '예수사건은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민중사건으로서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마치 화산맥을 따라 계속 폭발하는 것과 같다.'다시 말해 예수는 민중사건의 거대한 화산맥입니다!

▶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을 개념화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민중이 무엇이냐?' 하고 누가 물어올 때, 저는 민중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어요. 서구의 학문은 모든 것을 개념화해서 파악합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민중을 설명하면 개념이 되고, 개념이 일단 성립하면 그 개념은 실체와 유리된 것이 되어버려요. 그 다음에는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닌 죽은 개념과의 싸움만 남거든요. 내가 서구 사람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끝끝내 민중을 개념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을 미화한다고 그러지만, 우린 민중을 미화 안 해요. 있는 그대로의 민중을 볼 뿐이에요.

민중에 관해서 내가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한 가지 점은, 민중은 '자기초월'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민중들이 자기초월하는 것을 나는 많이 봤어요. 근로자들, 학생들, 그들의 어머니들을 봐요. 그들은 그 고통을 자기가 당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로 뛰어들어가지 않아요? 그것이 자기초월의 사건입니다. 동학혁명 같은 것을 예로 들어보면, 지성사적으로 도저히 그렇게 될 수가 없는데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한국 농민 개체를 보면 결코 그런 힘이 나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그런 거대한 힘으로 일어났거든요. 그것이 바로 민중의 자기초월 능력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민중에 대해서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고, 또 그 이상은 말할 마음이 없어요.

▶ '집단으로서의 민중이 자기초월을 할 수 있다. 자기초월해서 민중이 일으키는 사건이 예수사건이다.'이렇게 보시는 것이군요. 그럼 이제 선생님의 신학 하시는 방법의 특색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예컨대 선생님께서는 성서를 얘기할 때에도 반드시 그것을 오늘 우리의 상황과 관련지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선생님의 성서해석하는 방법상의 한 특징이 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는지요?

뭐 특색이라고 할 것까진 없고,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성서 텍스트를 가지고 얘기할 때에 언제나 컨텍스트(context)는 우리 현장이라는 겁니다. 반드시 그 눈으로 성서를 보지요. 자연히 해석도 그 방향으로 가게 마련이고요.

전에는 늘 그랬지만, 최근에도 서양책을 읽거나 일본 사람들의 신학책을 읽으면 느끼는 건데, 그들에게는 신학 자체가 그들의 장(context)이에요. 가령 '바르트가 무슨 말을 했고, 불트만은 저렇게, 보른캄은 이렇게 말했다. 틸리히(P. Tillich)는 뭐라고 그랬다.' 이것이 신학하는 장이 되고 있다 이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말과 말, 견해와 견해가 대결하는 것이 그들의 신학이고 또 그 대결 자체가 다시 그들의 학문하는 장이 되고, 이렇게 돌아가고 있어요. 현실은 배제된 채 학문 그 자체가 컨텍스트가 되어 있어요. 금년에 일본 가서도 그걸 보고 참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어요. 동경대학의 신약학자 아라이 사사쿠(荒井 獻) 교수와 얘기를 나누면서 그걸 느꼈어요. 그에게 말해줬어요. "너와 나의 차이는 그거구나. 나는 한국 민중의 현실을 가지고 신학하는데 너는 그 '장'이 없구나." 그도 그것을 인정해요. 그는 퍽 진보적인 신학을 하는 사람이고 결론도 나와 비슷하게 나오는데, 마지막 결론 부분에 가서는 한국의 민중신학을 말하고 특히 내 이야기를 인용하기도 해요. 그것은 그가 현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