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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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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 그렇다면 이제, 민중신학에서 꿈꾸는 이상적 교회라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이 자연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글쎄? 가령 라틴아메리카에서의 basic community, 그런 말이 생각나는군요. 밑바닥 공동체! 밑바닥 공동체라는 것은 개념이 아니고, 라틴아메리카 사회현실에서 산부가 하도 모자라니까 신부 없이 평신도들끼리 이끌어가는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도 목사 없는 미조직교회가 밑바닥 공동체라고 할까? 평신도들끼리 모여 성경을 읽고 해석을 하고, 이렇게 예수에 대해 이해하다보면 기존의 해석이나 이해와는 점점 다른 면모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끼리 자생적인 물음으로 보는 성서해석이 새로운 것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나도 어릴 때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때를 회상해보면 무식한 집사, 장로 둘이 엉뚱한 해석을 엉터리처럼 많이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시 주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을 내 입장에 서서 조소를 했었는데, 저들이 어떤 삶의 조건에서 성서해석을 했던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돼요. 자기가 선 자리에서 지적(知的) 유산의 빛에 조명하여 거르지 않고 절실하게 성서를 보는 눈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다 있었던 경우이고, 대부분은 교회에서 세뇌되었기 때문에 몇 가지 교리적인 전제를 그대로 반복했다고 기억돼요. 소위 '밑바닥 교회'라는 것은 기존체제 신학이 들어가지 못했거나 들어가지 않은 데서 또는 교권이 침투하지 않은 영역에서 자급자족하는 속에서 자라나는 공동체(Gemeinde)인데, 바로 그런 조건이 민중교회로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본의 아니게 가톨릭의 중앙집권체제를 거부하고 나온, 꼭 있어야 될 개혁의 표본이 될 수도 있다는 가상을 해봅니다.

민중교회는 성직자가 독점했던 성서해석권을 민중의 삶 속에 되돌려주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교역자나 신학자는 '내가 가르친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옳다' 하는 데서 후퇴하여 아주 단순한 눈으로 성서를 읽고, 생활(삶) 속에서 형성되는 민중의 느낌과 생각을 신학적 언어화하며, 교회지도층은 그것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봐요. 그들의 애환과 그들의 한(恨)에 찬 눈에 성서가 어떻게 보이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되며 용기를 주는가를 찾는 일이 더 중요하지요. 논리적 설명으로 지적으로 세뇌시키고 군림하려고만 하던 잘못을 중단해야지요. 제도가 있는 한 지도층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직자를 위시한 지도층은 삶의 한가운데서 고투하는 민중을 존중하고, 저들이 고뇌 속에서 성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계시만큼이나 존중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또 저들이 그렇게 자기 소리를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도적으로 만들어야 해요.

다음으로 떠오르는 민중교회의 태동은 노동자들의 현장이라고 봅니다. 우선 그곳은 산업선교에 의해서 노동자들이 많은 문제를 안고 정해진 장소에 모여서 기존사회의 비리에 대한 자기들의 울분과 하소연, 그리고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면서, 그들의 삶을 그대로 보고하면서 절규도 하고 함께 노래하되 일치된 호흡으로 당장 새 세계가 온 듯한 축제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입니다. 그것을 보면, 저들이 비록 하느님이나 예수의 이름 한 번 들먹이지 않아도 그 절규가 진실한 기도요, 그 노래가 믿음을 담은 찬송으로 들려요. 성직자는 새삼 저들에게 기존의 교리로 그들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수렴하여 다른 언어로 기도하고 축복하여주면, 그것은 정말 산 제물을 드리는 예배요, 바로 그 자리가 교회이겠지요. 우리는 지난 2~3년 간 이같이 움트는 교회의 싹을 도처에서 봤습니다. 금요기도 회, 목요기도회, 갈릴리 교회 그리고 당면 문제를 안고 모인 집회들에서, 이런 경험에서 발전한 산정신을 기성교회는 도입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요소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기존의 질서와 체제들을 과감히 개혁할 용의와 용기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모델로 생각되는 것은 우리의 민중 전통에서 나타난 예배형식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과 들은 것 가운데 두 가지 경우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는, 내가 어릴 때 유랑민으로 만주 땅에서 사는 한국인 동리에서 경험한 부락제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씩 부락제를 지내요. 저들은 집집마다 일정한 돈을 걷어 돼지를 몇 마리 잡아요. 그리고 각 가정에서 하얀 밥을 지어와요. 동리 대표들이 정해진 지점을 제단으로 삼고 이것들을 전부 진열해놓고 정해진 주문을 외우는 등 제사행사를 치릅니다. 그러고 나서 그 제물들을 나누어 먹습니다. 한 신에게 바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나눔의 모임, 그것은 글자 그대로 '하나 되는 축제'입니다. 이 원리는 집에서 조상을 모시는 경우와 같습니다. 식사 때마다 조상의 제단에 음식을 바쳤다가 식구들이 그것을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에서 도식화된 새크러먼트에서 받는 것 이상의 감격을 했다고 기억돼요.

또 하나는 샤먼, 즉 무당굿입니다. 서남동 교수가 한의 사제(司祭)라는 발상을 했지만, 무당들의 주된 역할은 억울한 자들의 한을 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 동기야 어쨌든 상관없어요. 무당은 한 맺힌 사람, 그 가족, 마침내 청중과 혼연일체가 되어 혼신을 쏟아 한풀이를 하여 그들을 원망이든, 복수심이든, 슬픔이든 그것에서 해방시켜요. 그 분위기는 도식화된 기성교회의 예배와 비교가 안 됩니다. 나는 여기서도 또 하나의 산 교회의 모델을 봅니다. 우리 민속의 탈춤도 중요한 민중교회적 성격을 다분히 지녔습니다. 현영학 교수가 이 점을 집중 연구하고 있지요. 탈춤은 특히 눌린 계층이 해학과 흥겨운 축제로 절망을 극복하면서, 신분적 억압자에 대한 저항을 승화하면서 삶을 영위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