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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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성서를 보는 눈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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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어떤 사람들은 성서는 영(靈)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든지, 또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러나 그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즉 성서를 이해하려면 어떤 특수한 '오르간'(Organ)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성서는 인간에게 필요없는 책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특수한 오르간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서의 문자를 통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또 그런 것을 못 가진 사람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책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영의 눈 또는 믿음의 눈으로 보라는 말은 성서를 성서가 가진 눈으로 보라는 뜻이라면 옳은 말이다.

성서가 가진 눈은 바로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중심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성서를 생활 전반을 위한 교서(敎書)로 보았다. 그래서 그 안에서 종교윤리의 규범을 찾으려고 애써왔다. 나아가 서는 그 안에서 역사, 지리 나아가 우주관과 세계관을 형성했던 것이 중세 그리스도교이다. 이런 입장에 선 저들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사탄의 후예로 생각했으며, 다윈의 진화론이 나왔을 때는 천지이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대소동을 벌였다. 왜냐하면 성서가 형성될 시대의 세계상은 지구가 중심이고 그 위와 아래에 다른 차원의 세계가 공간적으로 자리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또 창세기는 처음부터 인간을 창조했다고 되어 있지 어떤 동물이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문은 이 지구의 역사를 억(億)의 단위에서 계산하며 인간 역사를 몇 만(萬) 단위로 계산한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된 아담으로부터의 계보를 연대사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면 6천년 정도로 계산되기 때문에, 교회는 이러한 과학적인 결론에 대항하는 것을 마치 성전(聖戰)의 투사 그 자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그러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것들을 가르치는 교본이 아니다. 성서는 그러한 시대적인 제약을 받은 세계관을 도구로 사용했을 따름이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물론 성서를 하나의 오랜 역사적 자료로 보고 한 특정한 지식을 추구할 수도 있다. 가령 지리학을 하는 사람은 그 안에 나오는 지명에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식물학을 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식물의 이름들을 찾아서 그 식물이 어느 시대에 어느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는 자료로 할 수 있으며, 역사학을 하는 사람은 그 역사적 기록이나 상황묘사에서 그 시대의 역사적 자료를 찾을 수도 있다. 그 안에는 그 시대의 역사적 자료가 단편적으로 전승되어 있기 때문에 성서에서 나름대로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일 까닭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특정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성서 자체가 나타내려는 것을 보는 눈이 없을 때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가령 성서의 첫 책인 창세기를 읽다보면 중학생 정도의 지식만으로도. 첫 장에서부터 회의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세계창조의 과정이 진화론의 설명과 결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창조설화는 서로 다른 두 자료가 평행되는데(1장과 2장), 그 창조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 즉 한 자료에서는 생물 중에서 사람이 제일 먼저 창조됐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맨 나중에 창조된 것으로 되어 있다. 진화론의 틀에 이 설화를 맞추어보려는 사람들은 이 자료에서 많은 암시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화론의 원리나 순서를 찾기 위한 자료로 성서를 평가하려고 하면 그 출발부터 비과학적이다. 까닭은 그것이 과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을 역사 안에서 창조된 첫 인간으로 보고 그 다음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곧 암초에 부딪치게 된다. 낙원에서 추방된 후 아담은 카인과 아벨이라는 두 자식을 갖게 되는데, 카안이 아벨을 죽인다. 그러면 세상에는 세 사람만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르고 추방당한 카인이 다른 지역에서 결혼하여 한 씨족을 이룬다. 이것부터가 창세기의 설화를 하나의 의미없는 동화처럼 웃어넘길 위험을 안겨준다. 그러나 성서 편자는 이런 모순을 은폐하려 하지 않는다. 성서 편자로서는 본래부터 인류의 기원을 쓰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해져내려오는 민담에서 인간(히브리어로 '아담')을 말하려고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 선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가령 노아 홍수의 이야기를 보자. 한 과학자는 이 기록에서 어느 시대에 그 근방에 큰 홍수가 있었다는 사실에 착안할 수 있다. 그는 지질학적인 조사 또는 그밖의 전승에 의해서 정말 큰 홍수가 나서 지구상에 큰 변동을 일으킨 사실이 있었음을 확인한다고 하는 경우, 그는 "그러니까 성서는 진리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연구를 계속한다면, 그 홍수는 세계 전반에 걸쳐서 생긴 일이 아니고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만 있었다. 그런데 성서의 기록은 전세계 인류의 심판이라고 했다. 현대 과학이 가져다주는 지식을 통하여 비가 40일을 내려 지구를 덮었다든지, 모든 생물을 한 쌍씩 전부 방주에 수용했다든지, 하늘에 창문이 열렸다든지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을 경우, "그러니까 성서는 무가치한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관심의 방향이나 결론은 성서 자체의 책임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관심 둔 자의 일이다. 성서의 기자는 이 홍수 이야기 자체를 그대로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서 전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책임을 성서에 돌려서 그 평가를 결정짓는 것 자체가 비과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