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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비록 성서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순수한 눈으로 그 기사를 읽어가면 이것을 전하는 기자가 이 전설을 통하여 밝히고자 하는 핵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로써 위에서 언급한 기록들을 관찰해 보자.

이미 지적한 대로 창세설화는 두 가지가 있다. 창세기 1장 1절~2장 4a절이 그 하나요, 2장 4b절 아래의 것이 다른 하나이다. 처음 자료는 그 끝부분인 2절과 3절 등에서 이레째 되는 날에 대한 서술법이 다른 사제문서와 일치하므로 학술적으로 P자료라고 부른다. 이 서술에서는 우주창조의 과정을 말하면서 우주론적 관심을 뚜렷이 표명한다. 그런데 그 서술의 내용은 홍수를 겪는 충적층지역(沖積層地域)에서 볼 수 있는 세계상이다.1)침멀리(Zimmerli), 김정준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1, 39면 이하. 이 같은 혼돈상태는 페니키아의 상쿤야톤(Sanchunjathon)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유한 설화가 아니다. 그러나 편자는 이 설화를 신학화하려는 노력을 뚜렷이 보여준다. 가령 다른 세계 형성의 신화는 주로 해와 달을 많이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광명'(ma'or)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 혼돈 속에서도 어떤 다신적(多神的)인 요소가 되는 반신적(半神的)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것, 그리 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무대로서의 우주론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의 창조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를 인간의 조작을 나타내는 것과 구별하여 사용하는데 '바라'(br')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른 자료(하느님을 Jahwe라고 쓰므로 J자료라고 한다)는 우주창조보다 인간에 대해서 초점을 모은다. P자료에서는 하느님이 자기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데 반해 J자료는 사람(아담)을 창조했는데, 그가 홀로 있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아서 아담의 뼈를 취하여 동반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이 창조의 본뜻과는 달리 '타락'하여 '낙원추방'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음을 묘사하는데 이것은 인간 역사화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 설화도 흔히 있는 민담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신학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그 하나는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로 묘사하여 창조주와 피조자를 질적으로 구별하려고 한 것이다. 바빌론의 아트라-하시스(Atra-hasis) 창조 서사시에도 사람창조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 목적은 그 신들의 몸종, 신탁의 시중꾼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 땅을 관리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창세 2, 15). 이 점은 P자료에 더 뚜렷하게 표현된다. 인간은 땅 위의 모든 것을 개발하고, 자연과 그 위의 생물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는다.

위에서 다른 두 편자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이들 외에도 또 다른 편자들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저들은 그 이전에 전승된 민담을 자료로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편집하면서 신학화하고 있다. 바로 이 신학화의 과정이 주목할 대상인 것이다.

또 하나의 자료인 노아 홍수설화를 살펴보자. 그것은 창세기 6장 5절~9장 17절까지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자세히 보면 우선 중복된 것들과 한 가지 사실을 다르게 중복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6장 22절과 7장 5절을 비교하면 똑같은 내용인데 하나 다른 것이 있다. 6장 22절은 하느님(원문은 'Elohim')이라고 했고, 7장 5절에는 야훼(Jahwe)라고 하였다. 즉 하느님의 이름이 다르다. 또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가령 방주로 들어가라는 명령이 6장 18절과 7장 1절에 두 번 반복된다. 또 명령한 내용이 현저히 다른 것이 있다. 가령 6장 19~20절, 7장 15~16절에는 모든 생물을 한 쌍씩 방주에 실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7장 2절에는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씩, 그리고 부정한 동물은 두 쌍씩이라고 하였다. 또 홍수가 끝난 후 방주에서 나온 다음의 이야기도 둘이 있다. 8장 20~22절에는 노아가 제물을 드렸을 때 하느님이 "인간이 비록 악하여도 다시는 인간들 때문에 땅과 그 위의 생물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9장 1~17절에는 축복을 내리는 하느님과 언약을 맺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상의 간단한 비교로써도 일반 독자는 홍수에 대한 두 가지 전승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은 편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편 학자들은 그 원문연구에서 이 두 자료의 말의 구조가 전혀 다른 것을 밝혀주고 있다. 또 학자들은 홍수 이야기가 성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동아시아 일대에 이미 퍼져 있었던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그 구약의 홍수 이야기 자체가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홍수 이야기는 7장부터 8장 중간까지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앞뒤에 그 의미를 해석하는 서론과 결론이 있다. 홍수가 생긴 원인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이다(6, 5~7). 하느님은 지상의 모든 생물을 쓸어 버리기 위해 홍수를 내린다. 그런데 홍수 끝에 하느님은,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 21~22)로 되어 있다. 또 하나의 자료의 결론인 9장에도 다시는 인간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같으나 그 안에는 인간과 하느님의 계약에 의해서 인간은 절대로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 것"(5~6절)과 동시에 하느님은 사람을 멸하지 않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 이 서론과 결론을 보면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그것은 인간의 죄악은 죽음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처음 진노는 인간과 땅 위의 생물을 전멸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새로운 축복, 새 출발에 대한 선언으로 바뀐다. 그것은 인간이 선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방적인 자비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이 역사' 이 인간의 삶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역사관을 볼 수 있다.

이 이야기 자체는 시대적인 제약을 받고 있다. 따라서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민담을 도구로 위대한 사상을 전개하고, 장엄한 선언을 한다. 그것은 성서를 꿰뚫고 있는 큰 테마이다. 성서를 읽을 때 사람들은 이러한 핵심적인 주장에 마주서야 한다. 그 중심적인 주장 앞에서 비로소 그것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결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예들에서 본 대로 구약은 여러 갈래의 자료들이 섞여 있으며, 그 자료의 많은 것은 민담적인 것이다. 그러한 민담이 이스라엘의 신앙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재해석됨으로써 사상화되었으며, 그것을 성서의 편자들은 편집을 통해서 그 시대인에게 주는 글로 되살려 한 체계를 이루었다. 그것은 신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에서 제일 문제 되는 것은 네 가지 복음서이다. 이 네 복음서는 한 사건, 즉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보도한 것인데 각기 매우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우선 처음 세 복음, 즉 마태오, 마르코, 루가는 그 자료나 또 그 순서로 보아서 상당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이 이 셋을 공관서라고 부른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그 자료나 순서나 관점이 공관서와 판이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따로 취급하며, 그 연대도 비교적 후기이기 때문에 사실(史實)에 대한 보도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그 신학적 고유성에 더 관심을 갖는다.

우선 공관서를 좀더 자세히 보자. 루가복음의 기자는 그 복음의 머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데오필로 각하,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많은 사건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글을 써냈는데 그들은 처음부터 그 사건들을 목격하고 말씀을 위하여 몸바쳐 일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하여준 대로 썼습니다. 그런데 나도 이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하여둔 것이 있기 때문에 각하를 위하여 차례대로 써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1, 1~3).

이상에서 루가가 그 복음서를 무엇으로 어떻게 썼나 하는 것이 밝혀졌다.

첫째, 그가 그 복음서를 쓸 때 이미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많은 사건에 대하여" 쓴 글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이미 거룩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둘째, 그 자료들은 "그 사건들을 목격하고 말씀을 위하여 일한 사람들이 전해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루가는 이 모든 자료들을 종합하여 "자세히, 차례대로" 썼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그 자료들은 어떤 것들인가? 루가가 이 복음서를 쓴 것은 A.D. 1세기말 무렵이다. 그러니 예수가 처형된 후 6, 70년이 경과된 때다.

그 동안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지다가 어느 단계에 가서 성문화한 기록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우리가 밝힐 수 있는 것 중에 응결된 자료로서 두 가지를 찾아낼 수 있다. 그중의 하나는 마르코복음이다.

루가복음을 마르코복음과 비교하면 예수의 활동무대의 지리적 순서가 거의 일치한다. 마르코에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데서 출발해서 광야의 시험,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선택함과 동시에 주로 그곳을 활동의 무대로 하였고 최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약 1주일간을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되는 것이다. 루가는 대체로 이 순서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마르코를 그 중심자료로 가지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루가에는 마르코에 없는 말씀들이 많다. 우선 루가에서 마르코를 빼내면 또 하나의 다른 자료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 자료를 밝히려면 마태오와 비교하여 보면 알게 된다.

마태오도 루가처럼 마르코의 순서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그 안에도 많은 다른 말씀들이 보인다. 마태오에서 마르코를 빼내면 그 자료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이 둘, 마태오와 루가에서 마르코 자료를 뺀 남은 자료들을 비교하여보면 거의 똑같은 것들이 있다. 따라서 루가와 마태오는 마르코 외에 또 하나의 자료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르코처럼 독립된 문서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학자들은 편의상 그 자료를 Q(독일어에서 자료를 뜻하는 Quelle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라고 부른다. 그러면 루가는 Q라는 또 하나의 자료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루가에서 마르코와 Q를 빼고도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마태오에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루가의 특수자료라고 한다. 이로써 루가는 자기가 직접 목격한 것을 기록한 것도 아니요 직접 창작을 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있는 자료들을 '자세히', '차례대로' 정리한 편집자였다. 그는 마르코의 순서에 Q자료를 사이사이에 삽입한 것이다. 그러나 그 편집순서는 마태오와는 전혀 다르다. Q자료는 대체로 어록인데, 가령 산상설교나 비유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마태오는 이 Q자료의 많은 부분을 5~7장에 수록한 데 대해서 루가에는 6장에 그 일부가 있고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2)안병무, 『신약성서개론』, 대한기독교서회, 30면 이하.

그러나 루가나 마태오는 그저 아무 입장도 없이 그 자료들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저들은 각기 그들의 입장에 의해서 그것을 편집함으로써 그것들을 재해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자료들도 약간씩 다르게 전승되어 있다. 이 사실은 두 복음서가 각기 다른 고유한 자료를 제공하지만 그 배열에서 그 입장의 상이함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상에서 밝혀진 것은, 공관서 중에 마르코가 가장 처음 씌어진 복음서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마르코는 어떤가? 우선 마르코를 읽어보면 그것은 예수에 관해서 쓴 것이면서도 전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기라면 어떤 인물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서술은 그가 날 때부터 연대적인 순서를 밝히고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라는 것을 밝히며 그의 풍모 등을 서술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의 하나다. 우리는 그 당시의 어떤 영웅의 전기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것들과 비교하면 판이하다. 마르코에는 예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없고 공생활(公生活)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는 연대의 정확성을 나타내거나 그 시대의 상황을 밝히는 일이나 예수의 풍모를 나타내는 데 관심이 없다. 그는 막연히 '그 무렵에', '그때에', '그 다음날', '며칠이 지나'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언제인지 알 길이 없으며 예수의 풍모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어 그가 수염을 길렀는지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는 예수의 생애를 서술하려는 관심보다도 어떤 한 초점을 향해서 붓대를 놀리고 있다. 그것은 '그리고', '그리고 곧'이라는 접속사로써 간단간단히 지나가 버리는 수법에서 볼 수 있으며, 예수의 말씀을 별로 많이 기록하지 않은 데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이미 한 형태로 응결되어 단편적으로 전승된 자료들을 엮어나갔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예수의 수난사에 집중한다. 그러기에 예수의 기록의 절반을 그의 수난사에 집중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것과 평행된 Q자료에는 전혀 없다는 것을 감안할 때 특이한 것이다.

그런데 그 수난사도 전기적이 아니라 그의 죽음의 의미를 말하려는 고백적인 것이다. 즉 그의 관심은 왜 어떻게 수난당했느냐를 객관적으로 밝히기 보다도 그의 수난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를 밝히는데 있다.

예수의 수난사는 마르코가 이 복음을 쓰기까지 적어도 40년간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공동체 안에서 그것을 기도로, 찬양으로 계속 반복해오는 동안에 그 전승은 하나의 틀이 생겼던 것이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생애보다는 그의 죽음의 의미에 관심을 기울였고, 또 그 죽음이 무엇을 뜻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데 선교의 초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마르코는 이렇게 해서 형성된 수난사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르코는 한 역사가(歷史家)로서 예수를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때 그리스도인들의 예수의 사건에 대한 증언을 편집, 전승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서를 보는 눈은 그 서술된 자료들이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하는 데 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전승된 자료에서 그리고 그 자료의 편집에서 예수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신약을 읽는 독자가 처음부터 부딪치게 되는 암초는 예수의 탄생설화를 둘러싼 이른바 전역사(前歷史)이다. 이것은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에 있는데, 먼저 지적할 것은 두 자료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고 맨 처음의 복음서인 마르코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로 보아서 두 복음 편자들은 후기에 각기 민담과 같은 형태로 전승되어 온 내용을 자료로 수록하되 편자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마태오에는 어린 예수가 날 때부터 박해의 대상이 된다. 헤로데왕이 그가 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위협을 느껴서 학살하려고 한다. 그런 정황에서 그 어린이의 탄생소식을 탐지하고 와서 절하는 사람들은 동방에서 온 '점성가'들이었는데, 그들은 이 어린 예수에게 왕적인 예우를 한다. 마침내 이 어린이는 에집트로 피난한다. 이 같은 일련의 내용들은 모세설화를 방불하게 한다. 왕적 대우가 그렇고, 어린이들의 학살이 그렇다. 마태오복음의 편자는 유다 율법의 상징인 모세에 대해서 새로운 법을 주는 그리스도로 부각시키려 했음에 틀림없다.

이에 대해서 루가의 탄생설화는 그 어린이가 말구유에서 나고, 천직(賤職)으로 알려진 목동들의 경배를 받는 것으로 그려져 마태오의 그것과는 대조적이다. 가난한 자의 메시아로서 예수를 부각시키는 그의 메시아관의 반영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이러한 설화에서 그 사실성(史實性)에 집착하거나 회의에 빠지는 것은 논밭에서 기계류를 찾으려는 격이다. 아니, 이런 설화들은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들의 메시아관을 민담적인 서사시 속에 담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눈은 성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서를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망령이 지주 등장한다. 만일 어떤 독자가 이것을 읽고 셰익스피어는 망령을 믿었다고 단정하거나, 또는 망령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비과학적이며 따라서 그것을 완전히 무시해버린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가 망령을 등장시킨 것은 망령 자체가 있다 또는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도구로 그의 사상을 나타내려 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망령은 그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성서를 읽는 사람은 의외로 그것이 나타내려는 본뜻을 못 보고 지엽적인 데 사로잡힌다. 그 까닭은 성서는 특별한 책이기 때문에 특별한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성서는 사람의 말, 사람의 글로 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은 그 글을 통해서 그 안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서를 비판하여도 상관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비판한다는 입장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비판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과학이나 또는 어떤 사상적 입장에 서서 그것을 분석,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성서 자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비판할 수 있다. 성서도 사람의 글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이해하려면 분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비판하는 것을 불경죄라고 말하는 사람은 성서가 왜 씌어졌느냐 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성서비판을 배격하는 사람들은 그 비판정신이 이성주의(理性主義)에서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비판은 소위 이성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교 초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서비판의 첫 대가(大家)는 3세기의 교부 가이사리아의 오리게네스(Origenes)에서 시작된다. 그는 성서의 저자문제, 그 안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구분, 성서 안의 모순의 지적, 특히 복음서간의 차질과 모순 등을 광범위하게 비판하여 그 본뜻을 밝히려고 했다. 또 같은 세기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알렉산드리아의 감독)는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와 같다는 주장에 대해서 두 책의 사상이나 문장들을 비교함으로써 그 두 책의 저자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의 이 주장은 오랫동안 묵살되었다. 그러나 루터(M. Luther, 1483~1546년)에 와서 그것이 다시 문제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더 나아가서는 요한계시록은 기독교문헌일 수 없다고 보아서 처음 그의 번역에서 빼버릴 정도였다.

루터의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는 성서를 번역함과 동시에 성서는 성서로 하여금 비판하게 하라는 해석법의 기초를 세운 점이다. 그는 성서를 어린아기가 누운 말구유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그것 전체가 어린아기가 아니라 그 안에 어린아기가 누워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동시에 그 안에는 지푸라기 따위도 섞여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그는 야고보서 같은 것을 지푸라기와 같다고까지 하였다. 이것은 그가 성서 안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했음을 뜻한다. 비판의 눈으로 성서를 본 것은 칼뱅(J. Calvin, 1509~1564년)도 마찬가지다. 칼뱅은 교회의 건덕(建德)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루터처럼 노골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평생에 걸쳐서 성서강해에 총집중하였으며, 성서 전체를 무수하게 인용 강해하였으나 신약의 계시록과 구약의 아가서를 단 한 번도 인용하지 않고 있음은 그의 비판정신의 단면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성서를 본격적으로 학문적으로 비판, 연구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근대의 성서비판 연구의 계기는 일반 다른 학문의 새 발견과 그 경향에서 자극받아 생긴 것이다. 그중에 중요한 몇 가지를 들어본다. 첫째로, 자연과학의 발달이다. 전에는 성서의 우주관에 맞추어 천동설을 주장해왔는데 코페르니쿠스(N. Copernicus, 1473~1543년)가 지동설을 내세웠다. 그때 법왕은 이 주장을 반성서적이라고 권력으로 봉쇄해버렸다. 그러나 그후에 브루노(G. Bruno, 1550~1600년)의 우주의 무한대설, 그리고 케플러(J. Kepler, 1571~1630년), 갈릴레이(G. Galilei, 1561~1642년)의 뒤를 이어서 뉴턴(I. Newton 1642~1727년)의 만유인력론 등이 인정받음으로써 성서의 우주관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로, 인문주의자들의 고전(古典)에 대한 과감한 학문적인 연구가 재래의 고전에 대한 이해를 뒤집어엎는 결과를 가져온 사실이다.

셋째로, 이때의 경향과 병행해서 베이컨(F. Bacon, 1561~1626년), 데카르트(R. Descretes, 1596~1650년) 등의 인식론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이러한 관찰과 실험을 거치지 않은 모든 것은 다 편견이며 독단이라고 주장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전승적인 것을 전적으로 회의하는 현실 등이 재래적인 성서관에 회의를 품게 하고 성서를 새롭게 비판, 연구할 수밖에 없도록하였다. 그로부터 300년간 과거의 성서관과 그 위에 세워진 모든 것이 무너지는 과정을 거쳤다. 이때부터 성서는 열어보기 전에 믿으라는 주장에 대해서 열어보고 믿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성서의 언어학적 연구, 문헌비판적 연구, 역사적 연구, 종교사회적 연구를 거쳐서 그때까지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성서의 말의 의미, 그 구조, 그 시대적 배경 등을 밝혀냄으로써 성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큰 빛을 비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그 시대적인 조류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음으로써 너무 조급하고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과오를 범했다.

그러나 20세기초에 와서 성서의 고유성을 다시 보는 눈이 뜨였다. 이 고유성의 발견은 저 비판연구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가능했다.

그러면 일반 독자도 이러한 비판적 연구를 꼭 필요로 하는가? 그런 것을 모르고도 그것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다른 문헌을 읽는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어떤 책이나 그것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 없이도 읽고 감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언제나 모르는 것을 그대로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으며, 또 그것이 말하려는 것과는 먼 거리에 있는 엉뚱한 결론에서 자기도취할 수 있다. 성서를 읽을 때 이성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서려고 하면 정도의 차는 있겠으나 분석,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비판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지팡이이다.

성서는 사람에게 주어진 책이다. 그것은 사람이 읽고 이해하도록 씌어진 것이다. 이해 없는 신앙은 맹목적이다. 혹은 맹목적인 신앙을 찬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엇을 복종하라는 것도 모르고 행위할 수는 없다. 참 신앙은 이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성서비판을 무서워하는 것은 오히려 성서에 대한 불신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말 성서가 진리라고 믿는다면 비판을 무서워할 것이 없다. 진리는 아무리 비판하여도 파괴되지 않음을 믿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신앙이 아닐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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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약성서를 보는 눈」, 월요신학서당 편, 『신약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한다』(한국신학연구소, 1987).

로울리, H. H., 문희석채위 공역, 『구약성서 성장사』구약연구시리즈 1(대한기독교출판사, 1976).

뷔르트바인, E., 방석종 역, 『성서 본문비평 입문』(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퓌셀, K., 「물질주의적 성서강독 :성서본문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 관한 보고」, 백철현 편역, 『작은 자들의 하나님 :구약편』(기민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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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해석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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