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시대의 이스라엘은 엄격한 의미에서 국가가 아니라 종족동맹(Amphiktyonie)이다. 이스라엘은 왕을 세워서 국가체제를 갖추는 것을 꺼려 했다. 까닭은 그들이 정착한 후 계속 적대관계에 있던 가나안 부족들을 위시하여 많은 이방들이 그런 체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바빌론, 에집트 등은 대제국으로 벌써부터 왕정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들은 왕을 신 또는 신의 아들이라고 추앙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이 그들의 신과 결합하는 행사도 했는데 이른바 성혼(聖婚)이 그것이다.14)침멀리, 앞의 책, 110면.
로마의 카이사르(Caesares) 제도는 바로 이러한 중동의 제도를 딴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주권 주장은 왕권체제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부반응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이스라엘이 외세의 침략을 당하고 패배를 거듭할 때마다 왕권체제 같은 강력한 국가를 원했던 것이다. 사무엘상 8~12장은 판관시대에서 왕국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다. 이 서술은 통일성이 없고 언어상의 비교로 통해 보아도 여러 전승자료로 집성된 것을 알 수 있으나, 거기서 분명한 것은 왕권을 싸고 격론한 흔적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왕의 옹립을 원하던 측은 왕국을 이루어 강력한 체제를 갖추고 있는 이방과 대결하려면 그들과 같은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삼상 8, 5),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삼상 8, 20)라고 강변한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서 군국주의 형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되풀이된 구실이다. 이에 대해서 왕권수립을 반대하는 주장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첫째 이유는 사무엘의 입을 통해서 비교적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주겠다. 그는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을 시키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거나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보병의 무기와 기병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다. 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를 만들게도 하고 요리나 과자를 굽는 일도 시킬 것이다.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밭에서 좋은 것을 빼앗아 자기 신하에게 줄 것이며 곡식과 포도에서도 십분의 일 세를 거두어 자기의 내시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의 남종과 여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좋은 소와 나귀를 끌어다가 부려먹고 양떼에서도 십분의 일 세를 거두어갈 것이며 너희들 마저 종으로 삼으리라(삼상 8, 11~17).
이상의 경고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군국주의가 발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지휘체제를 확립하고 무기를 만들게 할 것이다. 그 결과는 민중이 왕의 사병화(私兵化)되어 "그의 밭을 갈거나 추수를 하게 하는 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둘째, 아들들을 사병화하듯 딸들도 왕의 향락을 위한 노예로 삼고 남녀 종들도 같은 목적으로 빼앗아갈 것이다.
셋째, 재산을 착취할 것이다. 밭과 포도원과 울리브밭의 좋은 산물을 빼앗아가고 그 수입의 십분의 일을 징수하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에게 절대권을 주면 인간을 노예화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반대 이유는—이것은 사실상 근본적인 것인데—그런 요구가 실은 하느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형태라고 보기 때문이다(삼상 8, 7ᆞ11, 19ᆞ12, 12).
이처럼 왕권수립을 반대하는 입장을 신학화한 이들을 신명기학파(Deuteronomist)라고 한다.15)삼상 7, 2b~17ᆞ8, 1~22ᆞ10, 17~27aᆞ12, 1~25는 신명기 학파의 첨가문이다(M. 노트). 그들은 이미 다윗왕조 이후에 쓰디쓴 경험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그 같은 역사의 악순환이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사무엘은 '백성'의 강요에 못 이겨 사울을 찾아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으나 그는 끝까지 비판적이었다가 사울이 사제권(司祭權)을 침범하는 것을 계기로 그를 저주한다(삼상 13, 13 이하). 그런데 그 '백성'은 어떤 부류인가?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고 만세를 부를 때 "이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으랴"고 하며 반대하는 소리가 있었고(삼상 10, 27), 반면에 "사울 따위가 우리 임금이 되겠느냐고 하던 자들이 누군지, 그런 자들을 죽여 버리겠다"는 결의를 표명하던 패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백성'이 둘로 갈라졌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사울의 왕권을 반대한 자들은 사회적으로 '비천한 자들'이었다.16)공동번역의 '못된 자들'이란 잘못된 번역이다. 그렇다면 그를 왕으로 옹립한 민중 '백성'은 권력 주변에 있을 수 있는 계층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사울은 종족동맹의 왕이 됐다. 그러나 그는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현지 사령관 같은 위치에 있었으며, 동맹의 종족 전체를 이끌 만한 힘이 없었다. 그가 한 일은 군대를 창설한 것이었는데 그 지휘권은 자기 집안이 전담하게 했다. 그리고 사령부도 자기 고향에 두었다. 그러나 그는 안팎으로 반대에 부딪쳤다. 사무엘과의 결렬, 새로운 세력 다윗의 위협, 마침내는 자식들과의 사이도 악화되었다.
사무엘상 28장에는 그가 무당을 찾아가서 이미 죽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애걸하는 일화가 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궁지에 몰려 있었나 하는 것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는 "야훼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로도 대답해주지 않는" 고립상태에 빠졌다. 그의 최후 격전지는 바로 민중이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 "내가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니요, 내 자손이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을 다스리실 분은 야훼시오"라고 한 판관 기드온이 미디안족과 싸워 이긴 길보아 산지였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불레셋군에게 참패했다. 요나단을 포함한 그의 아들들마저도 전사한 것을 본 사울은 제 칼로 자살해 버리는 비극으로 자신의 생을 끝낸다. 그의 통치기간은 겨우 2년이었다. 이것은 비극적 소왕국 이스라엘의 앞날을 예시하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