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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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솔로몬 왕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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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국시대
1) 솔로몬왕

다윗왕은 거덜난 민중을 규합하여 제힘으로 이스라엘의 남단에 위치한 유다 지방을 뺏어 왕좌에 앉고 뒤이어 이스라엘을 집요하게 공략하여 마침내 통합함으로써 통일이스라엘왕국을 수립했다. 비록 계속되는 전쟁으로 많은 피를 흘렸으나 이스라엘사(史)를 통틀어 유례없는 강대국을 만들었으며 다윗왕조의 기초를 놓았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다윗의 불륜의 아들로 이 거대한 왕국을 세습받은 것이다. 부왕(父王)이 닦은 터전에서 축적된 권력과 재산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일에 도취했으며 '지혜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꾀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그 왕국의 수호를 위해 국경지대에 요새를 세우는 일에 주력하고 수비를 위한 무장에 진력했는데 그의 군대의 전차(戰車)는 유명하다. 또 그는 부왕과 달리 전쟁보다는 외교를 선택하여 주변국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썼으며 또 보화를 거두어들이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많은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다윗은 그 의도야 어쨌든지간에 민(民)과의 접촉이 잦았으며 또 직접 권력과 관계되지 않은 종교에 대해서도 그 자율성을 인정하여 권력남용의 한계를 지킨 데 대해서 솔로몬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탁월한 조직력을 동원하여 행정체제를 정비하고 권력의 뿌리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 그 상징인 궁궐을 크게 짓고 이스라엘의 신앙의 상징인 '법궤'를 모시기 위한 성전을 건축하여 자기 왕국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다윗이 성전건축을 착수하려 했으나 많은 전쟁을 통해서 피를 흘린 그 손으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민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못했는 데 반해 솔로몬은 큰 저항 없이 그것을 해낸 까닭은 그만큼 그가 통치를 조직적으로 해나갔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가 성전을 지었다는 것으로 그의 신심(信心)을 추정해서는 안 된다. 그의 성전건축의 취지는 그 자신의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나는 나를 지키는 하느님 야훼께 성전을 지어 바치고자 합니다"(열왕상 4, 19). 즉 그를 지켜줄 신으로 야훼를 독점함으로써 그의 통치권의 후광으로 삼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또 성전건축을 다윗 왕조의 사가(史家)들이 크게 부각시키나 실은 그것은 크기에서나 위치에서 볼 때 궁전의 부속건물에 불과했으며 왕실 전용의 예배실과 흡사한 것이었다. 궁전 건축에는 본관만을 위해 13년을 소모한 데 반해 성전건축에는 그 절반인 7년을 소비했다고 한다. 크기로 보아도 성전은 궁전의 3분의 1도 못 되는 작은 것이었다(열왕상 6, 2).

그는 자기 왕국의 요새화를 위해 노동력과 세금을 강제징수했는데 숫자상으로 보아도 강제동원한 인력은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어마어마하다. 외국에서 자재를 반입하기 위하여 3만 명, 산악지대에서 채석하는 인원으로 8만 명, 그리고 그 사업을 지휘하는 상급관리만도 3,300여 명이라는 기록(열왕상 5, 27 이하)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그는 이웃의 부국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혈연관계로 바꿀 뿐만 아니라 축재하는 수단으로 거의 예외 없이 수교국의 왕녀들과 정략결혼을 했다. 가령 이스라엘의 숙적이었던 에집트를 위시하여 모압, 암몬, 에돔, 시돈 그리고 헷 등에서 온 여인들이 거명되고 있다(열왕상 12, 1). 그의 향락욕은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70여 명의 후궁을 소유했으며 그것 외에도 수청 드는 여인이 30여 명이나 있었다고 전한다(열왕상 11, 3). 그러므로 왕조사가(王朝史家)들마저도 "왕은 여인들에게 빠져 마음이 흐려졌으므로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고 평가한다.

이런 야욕을 채우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민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수반됐다. 그는 정략적이고 축재를 위한 목적으로 각 나라의 군주 집안과 혼인했고 그럼으로써 자기 나라의 근간을 오염시키는 종교적 침투를 허용해야만 했다. 즉 그는 후궁으로 외국 여인들을 맞아들일 때에 그들이 지참한 보화와 함께 수발하는 일정의 인원, 그리고 그들의 종교를 존중해준다는 조건을 수락한 것이다. 그 결과로 궁전내에 야훼종교 외에 여러 종교들을 위한 신전건축을 허용하고 그들의 포교노력을 묵인할 뿐 아니라 마침내는 솔로몬왕 자신마저도 후궁들의 영향력에 따라 여러 종교의 신전의식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게 하여 오랜 단일종교의 전통이 혼합종교로 둔갑한 것이다.

그에게 이 모든 것에 더해서 치명적인 잘못을 지적한다면 국가분단의 원인이 된 북이스라엘 배제, 남유다 중심의 정책을 편 것이다. 이것은 다음 절에서 보는 대로 국가 분단을, 나아가서는 국가 전체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