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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해석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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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분단 200년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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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단 200년

솔로몬이 B.C. 926년에 죽자 통일왕국은 갈라져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단의 시대로 들어선다. 그것은 잠시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200년의 분단시대의 돌입을 의미하며 마침내는 분단된 채 다 망해버리게 되는 역사적 분기점이다.

원래 남유다국과 북이스라엘은 다윗의 전략으로 연방국 같은 조약 위에 기초하여 한 국가를 이루었다. 다윗은 이 점을 고려해서 그의 통치시에 '지분'을 지켰다. 그래서 사제, 관직에 이르기까지 지분에 따라 배정했다. 그런데 솔로몬은 다윗의 뒤를 이음과 동시에 이 전통을 무시했다. 먼저 그는 스스로 대사제행위를 하고, 유다계만 사제직에 임명했고, 각료에서도 북이스라엘계를 제거해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득권 확보를 위해 성벽건설 등을 하고, 국경을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인을 징용, 징집했으며, 세금의 부담을 날로 높여갔다. 이에 대항한 이스라엘 민중항거가 빈번했는데 그중에서 세 차례는 솔로몬정권에 큰 위협이 되었다.

그중 한 차례 민중항거의 지휘자인 '여로보암'이 혁명 실패 후 에집트로 망명하여 칼을 갈다가 솔로몬이 죽자 급거 귀국하여 북이스라엘 중심의 구심점이 되었다. 한편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의 자리를 세습하자 첫 과제로 한 것이 북이스라엘과의 연합국 조약을 새로 체결하는 일이었다. 성서에는 세밀히 보도되지 않았으나 이것을 통해서 볼 때에 이미 북이스라엘에서는 반유다 내지 반다윗왕조 저항운동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르호보암이 고대 이스라엘의 야훼신앙의 상징의 하나인 '세겜'을 협상의 장소로 한 것은 정치적 배려다. 유다의 입장에서 쓴 열왕기서에는 그때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엄밀히 말하면 추가 승인이다) 모여 있었다고 하는데(열왕상 12, 1), 여로보암을 대변자로 내세워 솔로몬 때의 억압적 착취를 상기시키면서 그 같은 통치를 안한다는 서약을 요구했다. 르호보암은 다윗왕조를 섬기던 구신(I日臣)들을 따로 만나 의견을 물었더니 나이 많은 원로들은 르호보암에게 왕으로서가 아니라 민(民)의 종으로 그들을 섬기겠다고 서약할 것을 요구했다(열왕상 12, 7). 그러나 르호보암과 함께 자란 젊은 소장파는 더 강압정치를 펴서 소요의 조짐을 보이는 북이스라엘의 기선을 제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르호보암은 "선왕께서는 너희를 가죽채찍으로 치셨으나 나는 쇠채찍으로 다스리리라"고 하면서 원로들을 뿌리치고 소장파의 의견을 따름으로써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남유다(르호보암)는 그후 무력으로의 통일을 시도했으나 뜻대로 못했고, 그가 죽는 날까지 북이스라엘과의 소규모의 싸움은 계속됐다(열왕상 14, 30). 그 세대가 죽은 후에도 남북싸움은 지속되어(열왕상 15, 16) 분단의 골은 깊어만 갔고, 계속되는 전쟁통에 양쪽은 함께 쇠잔해만 갔다.

분단의 남북의 모습은 이렇게 요약된다. 남유다는 세습체제를 계속하면서 다윗왕조와 성전종교를 구심점으로 하므로 북이스라엘에 비해 안정세를 유지했다. 이에 대해 북이스라엘은 고대 이스라엘 종족공동체의 전통처럼 왕의 세습제가 아니라 카리스마적 임명제였다. 민중이 떠받드는 사람이 예언자들이 인정하는 과정을 통하여 왕아 됐다. 그러므로 고대 이스라엘처럼 군주제국에 비해서 변란이 자주 생겼다. 200년 분단기간중에 남유다에서는 왕권이 비교적 안정된 데 비해 북이스라엘은 왕이 19명이나 교체됐으며, 그중에서 8명은 살해 됐다. 이것은 정변이 잦았다는 뜻도 되지만 민의 힘이 컸다는 뜻도 된다.

한편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지역적 구심점이 있어온 데 대해 북이스라엘은 왕이 거처하는 수도가 마하나임, 세겜, 부스엘, 디르사 등으로 자주 바뀌었다. 이것은 외세침략과도 관련이 있으나 중앙집권제가 굳어 있지 않으므로 자기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하여 안정된 왕권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기도 하다.

북이스라엘의 탈유다화는 고대 이스라엘 전통을 계속할 때에만 그 명분이 선다. 그것은 정치도, 종교도 중앙집권이 아닌 민에 의한 공동체 형성이다. 그런데 다윗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고 유다와의 경쟁 심리가 작용하므로 그 방향성을 상실했다. 남유다의 중심인 성전에 맞서기 위해 베델과 단에 신단을 쌓는다든지 베델제단에 금송아지를 세워 성전건설의 기초로 삼는 것 등으로 점차 자기 전통을 잃어갔다. 이로써 오히려 남유다측에서 북이스라엘을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열왕상 12, 26~32).

그런 가운데 남유다는 계속 싸움을 걸어왔다. 그런데 그것은 통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분단상태를 고수하는 데 자기들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분단으로 예루살렘이 북단 국경지대에 놓이게 되어 그 안정성이 위협을 받으므로 예루살렘의 북쪽에 위치한 베냐민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계속 전쟁을 해 온 것이다. 우리 625 전쟁 때 임박한 휴전을 앞두고 고지쟁탈에 잔인한 동족살생의 극점을 이룬 것이나 분단상태에서 유리한 위치를 찾기 위해 50년의 세월을 반(反)통일방향으로 악용한 것이나 모두 흡사한 분단의 고통이었다. 이 같은 분단의 비극에 쇠잔해져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1년에, 남왕국 유다는 B.C. 586년에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베스터만, K., 손규태김윤옥 공역, 『천년과 하루』(한국신학연구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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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그리스도교와 국가」, 『현존』 제111호(19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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